게임 산업 역사에 길이 남을 빅딜이 새해 벽두를 뜨겁게 달궜다. 마이크로소프트(이하 MS)가 지난달 19일 글로벌 대형 게임업체 액티비전 블리자드(이하 블리자드)를 인수한다고 밝힌 것이다. 인수 완료 시점은 2023년이며, 인수가 완료되면 블리자드는 MS의 산하 회사가 된다.
MS는 블리자드 인수를 위해 687억 달러(82조 9000억원)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했다. 2019년 디즈니가 713억 달러(85조원)에 폭스 스튜디오를 인수한 규모와 맞먹는 수준이다. 액수로 보나 화제성으로 보나 게임업계 역대 최대 규모다.
이 소식은 게임업계뿐 아니라 전 세계 증권가, IT업계에도 막대한 파급력을 전했다. MS가 블리자드를 인수하면서 메타버스 주도권 쟁탈전에 본격 가세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게이머들의 시선은 조금 달랐다. 이들은 인수 액수와 신사업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은 대신 블리자드가 이전처럼 게이머를 위한 게임사로 회귀하길 바란다는 소망을 드러냈다.
미국 캘리포니아 어바인에 있는 블리자드 본사 중심광장에는 거대한 오크라이더 동상이 있다. 2009년 제작된 이 동상은 높이만 12피트(약 6.2m)에 무게도 2t 이상을 자랑한다. 오크라이더는 블리자드 직원들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과거 판타지의 약탈자와 같은 야만적인 이미지로 묘사되던 ‘오크’는 블리자드의 프랜차이즈 게임인 워크래프트 시리즈에서 기존 이미지를 벗고 주인공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마이크 모하임(現 드림헤이븐 대표) 블리자드 대표는 “자사를 대표할 수 있는 용맹한 오크라이더의 모습이 블리자드의 끊임없는 도전정신과 가장 어울린다고 판단돼 어바인으로 본사를 이전하며 동상을 건립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설명했다.
오크라이더 동상 가장자리에는 블리자드의 사명문과 경영철학이 담긴 8개의 비석이 있다. 사명문에는 ‘가장 장엄한 엔터테인먼트 경험을 만드는 데 전념하고 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또한 8개의 경영철학 가운데는 ‘게임플레이가 우선(gameplay first)’, ‘게임 품질이 중요하다(commit to quality)’, ‘내면의 열정(덕심)을 포용해라(embrace your inner geek)’ 등의 내용이 있다. 이러한 가치를 충실히 지켜온 블리자드는 오랜 시간동안 글로벌 최고의 게임사로 자리매김해왔다.
하지만 2010년 후반부터 블리자드는 여러 가지 사안으로 논란에 휘말렸다. 2019년 홍콩 시위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하스스톤 프로게이머 블리츠 청을 징계해 많은 질타를 받았고, 일방적으로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e스포츠 대회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글로벌 챔피언십(HCG)’를 폐지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블리자드가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추구하면서, 게임의 재미를 깨뜨렸다는 비판도 나왔다.
아울러 지난해 발생한 사내 성 추문 이슈는 블리자드를 존폐 위기로 몰았다. 캘리포니아주 공정고용주택국(DFEH)이 2년간 블리자드를 조사한 결과 사내에서 사내 성희롱 및 성추행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여성 직원은 남성 직원에 비해 보수, 승진, 해고 등 인사절차 과정에서 불이익을 수시로 받은 것이 확인됐다. PC를 부르짖던 블라자드의 부끄러운 민낯이 공개된 것이다. 경영진은 뼈를 깎는 변화를 약속하며 사과했지만, 싸늘하게 식은 여론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올해로 서른 살이 된 기자는 초등학교 2학년 스타크래프트로 블리자드 게임을 처음 접했고, 블리자드 게임을 즐기며 함께 나이를 먹었다. 오랜 친구가 만신창이가 돼가는 과정을 보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시간이 걸려도 좋다. 블리자드가 게이머의 ‘베스트 프렌드’로 돌아올 수 있다면 팬들은 기쁜 마음으로 충분히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블리자드가 초심을 되찾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