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도 작은데 4명 중 누가 이야기하는 지 알 수가 없어요. 수어통역사가 누굴 대변하고 있는지 헷갈려요.”
대선이 26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에 따라 후보들이 참여하는 TV토론에 대한 관심도 크다. 후보들의 목소리가 향후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농인들이 소외받고 있다는 지적이다. 선관위가 효율성과 현실적 문제만을 외치는 과정에서 장애인들의 참정권과 알권리가 훼손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들의 기본적인 권리 확보를 위한 구체적인 정책과 대안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여전히 지지부진한 논의를 거듭 중이다.
쿠키뉴스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는 이번 대선 후보 TV토론회에서 동시에 단 한 명의 수어통역사만 활용할 계획이다. 선관위 측은 발화자별 수어통역사 배치 의견과 관련해 △공정성‧형평성 △수어 비사용 유권자의 시청권 제한 △방송 제작기술의 한계 △추가 예산 소요 등을 이유로 수어통역사 추가배치에 난색을 표시했다.
아울러 선관위는 10일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도 “수어통역사를 동시에 두 사람 이상 배치하게 되면 일부 후보자가 수화 통역 화면에 가려질 수가 있다. 결국 수화를 사용하지 않는 유권자들이 선거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제한받게 된다”고 말했다.
결국 농인들의 참정권과 알권리가 훼손돼고 있다는 비판이다. 한국수화언어법에 따르면 ‘농인’이란 청각장애를 가진 사람으로서 농문화 속에서 한국수어를 일상어(제1언어)로 사용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실제로 지난 3일 지상파 3사(KBS·MBC·SBS) 합동 초청으로 열리는 2022 대선후보 TV토론에서는 단 한 명의 수어통역사만이 방송에 출연할 수 있었다. 선관위와 방송사는 중간에 수어통역사를 교체하기만 했다. 발화자 구분을 위한 노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11일 저녁 개최예정인 TV토론회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진행할 가능성이 크다.
농인들은 발화자별 수어통역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만약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발화자별 배치가 어렵다면 최소 2인 이상의 수어 통역사가 함께 배치돼야 한다고 했다.
농인인 김하정 씨는 “두 사람 대화에서 수어통역이 한 명이다 보니 이 사람이 누구를 대변하고 있는지 누구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는지 너무 헷갈린다. 내가 선거를 할 수 있는 투표권은 있는데 왜 뽑아야 하는 지에 대한 설명을 토론회에서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또 다른 농인인 이샛별 씨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이 씨는 TV토론만으로 후보를 선택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수어 통역사의 화면을 키워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다. 수어통역인이 등장하는 조그마한 창의 크기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며 “입 모양만 보기도 힘든데 화면이 작아 힘들다”고 말했다.
수어통역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손상희 수어통역사는 최근 쿠키뉴스와 만나 “두 사람의 입 모양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수화를 보는 사람들은 A 후보가 말하는 것인지 B 후보의 얘기인지 확인하기 어렵다”며 “통역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결국 한 쪽에 대한 입장만 전달할 수 밖에 없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또한 “당연히 각 후보별로 수어통역사가 배치되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게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한다면 최소 2명이 동시에 배치 돼야 한다. 그래야 방향성이라도 보여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선관위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 선관위 측은 10일 본지를 통해서 “공직선거법에 수어통역을 할 수 있게끔 돼 있다”면서도 “대신 몇 명을 해야 한다는 규정은 따로 없다”고 설명했다.
또한 수어 통역사의 추가 배치는 공정성과 형평성의 문제로 인해 어렵다는 입장을 되풀이했다. 선관위는 “수어 통역 화면에 후보자가 가려질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얼굴이 아예 가려져 공정성과 형평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술적인 부분도 문제로 꼽았다. 그는 “후보자별로 수어통역사를 배치하면 스튜디오나 부조정실, 카메라 등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조정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며 “발화자가 바뀔 때마다 수화 통역이 바뀌면 방송사고 위험도도 높다. 실무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해명했다.
아울러 “결국엔 법 개정을 통해 해야 하는 것”이라며 책임을 국회로 돌렸다.
하지만 정치권은 오히려 선관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오영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인권위에서도 두 명 이상을 활용하도록 권고를 했다. 결국 발화자별로 수어통역사를 배치하는 게 가장 바람직한 상황”이라며 “자주 있거나 예산이 많이 드는 일이 아니다. 당연한 헌법상 권리인데 기술적으로 되냐 안 되냐만 따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이미 선관위 등의 지원이 있으면 방송사에서도 도입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기술적으로는 케이블 방송 등 다른 곳에서도 가능하다는 게 입증된 상황이니까 얼마든지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반박했다.
이어 “선관위가 일부의 입장만 대변하고 있다. 후보의 화면이 작아지는 게 농인이 아닌 사람들의 참정권을 침해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개선 요구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다만 정치권이 농인들과 수어통역사들의 숙원을 해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민주당 다이너마이트 선대위는 10일 국회 본청 원내대표 회의실에서 ‘선관위 주최 대선TV토론 발화자별 수어통역사 배치’ 추진 간담회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윤호중 원내대표는 농인들 앞에서 “TV토론 발화자별 수어통역사 배치 안건이 국회정치개혁 특위 소위 문턱을 넘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이후 행사에 참여한 농인들과 수어통역사 역시 민주당에 대한 비판보다는 격려와 감사의 인사를 표시했다. TV토론 발화자별 수어통역사 배치가 농인들의 숙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 40분 뒤 민주당 측은 “해당 안건은 여전히 소위에 계류 중”이라며 입장을 번복했다.
이후 본지 취재결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개특위 소속 한 민주당 의원도 이날 통화에서 “관련 법안은 아직 소위에서 통과되지 않았다”고 확인했다.
전문가는 정치권의 세심한 정책 추진이 필요하다고 했다. 조성현 한국수어통역사협회장은 의무화를 핵심으로 꼽았다. 조 회장은 10일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해당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수어통역사들이 배제되는 경우가 있다. 현재 수어통역사 한 명이 4시간짜리 통역을 담당하는 경우도 있다”며 “제대로 된 전달을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부분에 관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또한 “수어통역과 관련한 법률 조항이나 가이드라인이 권고사항인 경우가 많다”며 “(수어통역 배치를) 의무화해야 제대로 된 정책을 실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기창 기자 mobydic@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