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설프고 혼란스러운 유년기 로맨스다. 왜 이렇게 좋은지, 좋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난 건 확실하다. 아니, 확실하지 않다. 아니, 확실한 것 같다. 이젠 뭐가 맞는지도 알 수 없다. 좋아할 수도, 떠날 수도 없다.
그동안 수없이 봤던 평범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한 순간도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연출을 맡은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자신의 스타일로 인물들이 마주치는 영화적인 순간들을 재구성했다. 익숙한 로맨스를 기대하면, 대체 이 영화가 뭘 얘기하고 싶고 어디로 흘러가려 하는지 몰라 난감해진다. ‘매그놀리아’, ‘데어 윌 비 블러드’, ‘마스터’ 등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영화를 즐겨봤으면, 이전보다 한결 친절해진 전개 방식에 놀랄 수 있다.
‘리코리쉬 피자’(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는 15세 아역 배우 개리(쿠퍼 호프만)는 중학교 졸업사진을 찍다가 25세 알라나(알라나 하임)를 만나 한 눈에 반하며 시작하는 이야기다. 개리는 적극적으로 알라나에게 저녁 약속을 잡고, 알라나는 어린 개리를 밀어내지만 싫지만은 않은 눈치다.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불안한 시기를 지나는 알라나는 개리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바쁜 개리의 부모를 대신해 알라나가 개리의 아역 활동에 매니저로 동행을 시작한다.
보통 로맨스 영화에서 사랑의 결실을 방해하는 건 상황이나 사건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는 환경이거나 특정 사건으로 멀어지는 등 마음이 이어지지 않는 장애물을 어떻게 뛰어넘을지가 관건이다. ‘리코리쉬 피자’에선 나이차를 제외하면 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당장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거나 상대의 마음을 물을 수 있다. 하지만 둘은 조심스럽게 서로룰 궁금해하고 때론 밀어내며 오랜 시간 함께 지낸다. 아주 먼 길을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원하는 것을 신중하고 단단하게 확인하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둘의 이야기를 친절하게 그리지 않는다. 둘 사이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순간을 일부러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몇 군데 공백을 그대로 놔뒀다. 별 의미가 없는 일상의 풍경 같은 장면과 아주 의미심장한 것 같은 장면이 뒤섞였다. 마치 세월에 풍화되어 순서 없이 듬성듬성 남아버린 오래 전 기억을 더듬는 느낌이다. 낡은 기억을 아주 또렷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로 들여다보는 부조화가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특유의 독특한 매력을 담고 있다. 개리와 알라나의 서사를 따라가지 않아도, 그 자체로 영화적인 아름다운 장면들이 가득하다.
제1차 석유 파동이 일어나던 1973년 미국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제목인 ‘리코리쉬 피자’도 1970년대 캘리포니아 남부 지역에서 인기 있었던 레코드숍 체인의 이름에서 따왔다. 당시를 지나온 미국인들에겐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겠지만, 한국 관객에겐 당시의 자유롭고 따스한 분위기만 전해지겠다.
개리 역할을 맡은 쿠퍼 호프만은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과 여러 작품을 함께한 고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배우의 아들이다. 영화 제작자로 활동하는 개리 고츠먼의 어린 시절 일화를 모티브로 해 이름도 따왔다. 알라나도 배우 알라나 하임의 이름을 그대로 썼다. 감독이 과거 밴드 하임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며 인연을 맺은 알라나 하임에게 출연을 제의했고, 실제 그의 가족이 모두 출연했다. 두 사람 모두 데뷔작이라 믿기 힘든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리코리쉬 피자’는 제93회 미국비평가협회 작품상을 수상했고, 다음달 열리는 제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후보에 올랐다. 오는 4월 열리는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여우주연상, 편집상까지 5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오는 16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