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뿐인 운명, 그래도 “인생 만세”…뮤지컬 ‘프리다’ [쿡리뷰]

고통뿐인 운명, 그래도 “인생 만세”…뮤지컬 ‘프리다’ [쿡리뷰]

기사승인 2022-03-25 06:00:11
뮤지컬 ‘프리다’ 공연 장면. EMK뮤지컬컴퍼니

“인생이여, 영원하라. 비바 라 비다(viva la vida·인생 만세).” 이렇게 읊조리는 주인공 뒤로 거대한 수박 그림이 펼쳐진다. 단단한 껍데기 아래 속살이 피처럼 붉다. 끊이지 않는 고통과 고난에도 ‘인생 만세’를 외친 주인공은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 그의 생을 다룬 뮤지컬 ‘프리다’가 지난 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개막했다. 여성 배우들과 여성 창작자가 중심이 된 이 작품은 운명에 맞서 전사처럼 투쟁한 프리다를 통해 벅찬 감동과 용기를 준다.

1907년 태어나 47세를 일기로 떠난 칼로는 상처투성이인 삶을 살았다. 6세 때 찾아온 소아마비는 그의 오른 다리를 좀먹었고, 18세엔 교통사고로 척추가 부서져 죽음 문턱까지 다녀왔다. 영혼의 반쪽이라 믿었던 남편 디에고는 외도를 일삼았고, 교통사고로 망가진 몸은 뱃속의 아이를 세 번이나 떠나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이 출렁일 때마다 칼로는 이 단어를 삶에 새겨 넣었다. 소아마비를 겪고도 의사가 되려는 꿈을 키웠고, 온 몸이 마비된 와중에도 그림을 그리며 스스로를 일으켜 세웠다.

‘프리다’는 이런 칼로의 삶을 액자 형식으로 보여준다. 칼로가 죽기 직전 토크쇼 ‘더 라스트 나잇 쇼’(The Last Night Show)에 올라 지나간 일생을 회고한다는 설정이다. 상상으로 만들어낸 쇼 진행자 레플레하와 보조 진행자 데스티노, 메모리아는 칼로의 수호천사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레플레하는 쇼 안에서 디에고를 연기하고, 데스티노와 메모리아는 칼로가 어린 시절 봤다는 죽음과 평행우주 속 건강한 칼로를 각각 맡는다. 네 캐릭터 모두 여성 배우가 소화한다. 배우 최정원과 김소향이 칼로 역으로 캐스팅 됐고, 전수미·리사(레플레하), 임정희·정영아(데스티노), 최서연·허혜진·황우림(메모리아)도 무대에 오른다.

‘프리다’에서 프리다 칼로를 연기하는 배우 최정원. EMK뮤지컬컴퍼니

“고통이 스토킹해도 두려워 말고 한잔 가득 샴페인을”이라는 ‘비바 라 비다’ 가사처럼, ‘프리다’는 신파와 통속 대신 뜨거운 에너지를 동력 삼아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그 안에서 칼로는 전사처럼 강인하다. 교통사고 후 다시 살기로 결심한 그는 노래 ‘코르셋’에서 “피하지 않아. 다만 견딜 뿐. 그게 나야”라고 포효한다. 여성 억압을 상징하던 코르셋은 작품 안에서 갑옷처럼 두터운 형태로 소환돼 칼로의 의지를 보여준다. 아이를 유산한 뒤 부르는 노래 ‘비 스트롱’(Be Strong)은 여러 모로 인상 깊다. 데스티노가 부르는 아리아는 죽음처럼 음산하고, 메모리아의 아리아는 흡사 장송곡 같다. 슬픔으로 적셔진 칼로의 얼굴이 살아가겠다는 결기로 차오르는 순간은 긴 잔상을 남긴다. 5인조 밴드가 연주하는 록 넘버들은 칼로의 이런 굳센 면모를 소리로 들려준다.

칼로가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관객 마음에 불꽃을 일으킨다면, 레플레하·데스티노·메모리아는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용기를 준다. 이들 세 캐릭터가 칼로에게 보내는 무한한 애정은 “행복하길 바라” “다시 시작해. 다시 쓰면 돼” 와 같은 가사에 녹아들어 관객에게도 연결된다. 배우들은 뛰어난 연기로 캐릭터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최정원은 고통마저 초월한 듯한 미소와 카리스마로 관록의 칼로를 만들어냈다. 알앤비 가수로 먼저 데뷔한 리사의 보컬은 ‘프리다’의 솔풀한 넘버와 좋은 궁합을 자랑한다.

객석 규모가 300여석 정도로 작고 출연 배우도 4명뿐이지만, 무대는 화려하고 다채롭다. 무대 뒤 벽면을 거울삼아 칼로의 주요 작품과 거울·벌새 등 오브제를 비춘 덕이다. ‘엘리자벳’ ‘모차르트!’ ‘웃는 남자’ 등 대극장 뮤지컬을 주로 선보여온 EMK뮤지컬컴퍼니의 노하우가 돋보인다. 다만 현대무용과 내레이션, 무대 영상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하이라이트 장면은 감정이 필요 이상으로 과잉됐다는 인상을 준다. 드라마와 코미디의 조합과 현대적 재해석이 돋보인 전반부와 달리, 칼로의 고뇌가 극에 달하는 후반부는 통속적인 전개로 아쉬움을 남긴다. 공연은 오는 5월29일까지 이어진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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