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에겐 쌀 두 홉이 간절했다. 임신한 채 일본으로 떠나는 딸에게 우리쌀로 밥을 지어 먹이고 싶었다. 일제강점기, 한국 땅에서 난 쌀은 한국인에게 금지됐다. 좋은 곡물은 모두 일본인 차지였다. 난처해하던 상인은 결국 몰래 우리 쌀 세 홉을 퍼 건네며 말했다. “무믄서 설움 쪼매 삼키라이.” 애플TV+ 오리지널 드라마 ‘파친코’ 속 장면이다.
‘파친코’가 지난달 29일 호평 속에 최종회를 공개했다. 재미교포 이민진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4대에 걸친 재일조선인 가족의 이야기를 그렸다. 한국 근현대사와 이민자의 설움을 새긴 이 작품은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인기다. 글로벌 비평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 한때 신선도 지수 100%를 기록했고, 외신도 “눈부신 한국 서사시”(BBC) “‘파친코’를 영원히 보고 싶다”(뉴욕매거진) 등 호평 일색이다. 고단한 역사를 견뎌낸 한국인들 이야기가 어떻게 전 세계를 울렸는지 세 가지 키워드로 살펴본다.
① 여성
“선자씨는 정말로 강한 사람이에요. 용기가 넘치는 사람이죠.” 오사카에서 보내는 첫날 밤, 이삭(노상현)은 마주 누운 선자(김민하)를 보며 말한다. 영도에서 나고 자란 선자는 어려서부터 꾀가 많고 이웃에게 친절했다. 일본 순사에게 고개 숙이지 않았을 만큼 굳세고 용감했다. 가난해도 당당하게, 시련 속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핏줄을 잇는다. 세상을 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하고 자긍심을 지킨 선자는 손자 솔로몬(진 하)에게 말한다. “잘사는 거보다 우떻게 잘살게 됐는가, 그기 더 중한 기라.” ‘파친코’를 두고 “한 여성의 회복력을 그린 보석 같은 작품”(포브스), “여성의 생존력과 가족의 끈끈함을 담은 가슴 벅찬 이야기와 비참한 시대상을 모두 보여준다”(할리우드리포트)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작품은 이런 선자를 특별한 개인으로 추키지 않는다. 오히려 수많은 선자들을 이야기 안으로 불러들이고 연결시켜 평범한 삶의 위대함을 역설한다. “여자가 배워서 뭐할라꼬.” 이렇게 말하는 선자의 어머니 양진(정인지)은 딸에게 ‘생존 DNA’를 물려준 장본인이다. 그는 억척스레 빈곤을 헤치고 살아남아 일과 가정을 꾸렸다. 식민지배가 숨을 조여와도 오갈 데 없는 식솔들을 놓지 않았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평생 일이라곤 해보지 않은 손윗동서 경희(정은채)는 자신 또한 매일 두려움에 떨면서도 품위와 연민으로 선자를 돌본다. 이밖에도 일본 순사들 눈을 피해 돼지를 키우며 삶을 꾸리는 노파, 죽음을 각오하고 판소리를 절창하는 오페라 가수 등 억세고 강인한 여성들의 생존과 연대가 작품을 이끈다.
② 역사
‘파친코’엔 식민 지배 역사가 선혈처럼 뚜렷이 새겨졌다. 양진네서 일하던 복희와 동희는 만주 공장에 좋은 일거리가 있다는 제안에 집을 떠났다가 해방 후에야 돌아온다. “우리가 이래 변한 꼴 보이고 싶지 않았다.” 노인이 된 복희(김영옥)의 이 말은 그가 ‘위안부’ 피해자임을 직감하게 한다. 작품은 우리 민족이 지나온 야만의 시대를 폭력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그들이 겪은 모멸과 수치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그래서일까. “일본의 한국 점령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파친코’는 이를 우아하고 예술적으로 표현했다”(롤링스톤)는 평이 나온다. 1923년 간토(관동)대지진 이후 벌어진 조선인 학살을 다룬 7화는 원작에 없는 내용이다. 지진으로 아버지를 잃은 고한수(이민호)는 조선인이 마구잡이로 죽어나가는 현실에 몸을 떤다. 제작자 수 휴는 간토대지진을 조사하던 중 “이(조선인 학살) 사건은 우리 역사교육의 일부가 돼야 한다”(에스콰이어)고 생각해 해당 에피소드를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두려움이 내 몸을 멋대로 주무르게 놔두면요, 나중엔 내 몸의 윤곽조차 낯설어질 거예요. 그걸 내 몸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이삭을 각성시킨 말은 서슬 퍼런 칼날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조선인의 존엄을 보여준다. “몸속에 한 맺힌 피, 그 핏방울 하나하나”는 세월이 흘러도 흐려지지 않고 이어진다. “(‘파친코’의 배경은) 1910년대 한국이지만, 제국 통치에 억압받고 분노한 사람들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가디언의 평가는 ‘파친코’가 세계인과 공명하는 지점을 짚어낸다. ‘파친코’ 속 조선인들이 통과한 수모와 저항의 시대가 영국 통치에 맞선 아일랜드(1916년 더블린 봉기)와 인도(1919년 암리차르 시위), 일본에 짓밟힌 중국(1937년 난징대학살)과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2022년 마리우폴)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가디언은 봤다.
③ 이민자
작품 제목인 파친코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을 은유한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 야쿠자나 파친코 사업에 발 들인 재일동포들에게, 인생은 잃을 게 많은 도박이다. 미국 아이비리그에서 유학하고 뉴욕에서 일하는 솔로몬조차도 그렇다. 미국에서 유리천장에 가로막힌 그는 위험한 게임에 커리어를 걸고 일본으로 향하지만, 그곳에서도 미묘한 적대감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대물림되는 멸시 속에서 재일동포들은 한국과 일본 어디에도 뿌리 내리지 못하고 부유한다. CNN은 이를 “대대로 이어지는 과거가 어떻게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는지 완벽하게 보여준다”고 짚었다. 어디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지만 혈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는 이민자 후손들의 딜레마는 현재 진행형인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넘어간 동포 대다수가 집 잃은 실향민이라는 점에서 작품은 최근 세계적인 화두인 난민 문제와도 연결된다고 할리우드리포트는 분석했다. “장소와 사람은 다를지언정, (‘파친코’에 나오는) 실향민과 난민은 우크라이나·시리아·과테말라 등 우리 현실과 멀지 않은 이야기다.”
‘파친코’의 미덕은 고난을 얘기하되 고통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원작 첫 문장에 담긴 정신은 드라마에도 고스란히 계승된다. 할리우드리포트는 “이 작품 오프닝은 침략, 식민화, 군국주의에 관한 다큐멘터리로 시작해 주인공들이 노래 ‘오늘을 위해 살자’(Let’s Live For Today)에 맞춰 즐겁게 춤추는 장면으로 이어진다”며 “이는 모든 에피소드가 아무리 암울하더라도 언제나 희망 한 조각을 갖고 있음을 약속한다”고 말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