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방탄소년단이 다음 달 컴백을 앞두고 입길에 올랐다. 새 음반에 싣기로 한 기존 발표곡 ‘필터’(Filter) 때문이다. 2020년 2월 발매된 ‘필터’는 스웨덴 작곡가 톰 비클룬드가 프로듀싱하고, 방시혁 하이브 의장과 싱어송라이터 정바비, 형광소년 등이 함께 만든 곡이다. 문제는 정바비가 폭행과 불법촬영 혐의(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로 지난해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팬들 사이에서 ‘숨은 명곡’으로 꼽히던 노래는 순식간에 애물단지가 됐다.
‘필터’가 포함된 방탄소년단 음반 트랙리스트가 10일 공개되자 온라인 여론은 즉각 달아올랐다. 성범죄 혐의가 알려진 작곡가의 노래를 신보에 재수록해선 안 된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SNS에서는 해시태그 ‘정바비_곡_불매’를 단 글이 이어지고 있다. 정바비가 쓴 곡을 듣거나 구매하지 않겠다는 아미(방탄소년단 팬덤)가 만든 해시태그다. 정바비는 ‘필터’ 외에도 방탄소년단 노래 ‘앤서: 러브 유어셀프’(Answer: Love Yourself), ‘홈’(Home), ‘러브 메이즈’(Love Maze) 등 여러 곡을 작업했다. 팬들은 “공연에서도 (이 곡들을) 듣고 싶지 않다” “후배 그룹 팬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며 불매 운동을 펼치고 있다.
방탄소년단 멤버들도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필터’ 등 신보 두 번째 CD에 담긴 곡들을 멤버들이 직접 골랐다고 소속사가 설명하면서다. 방탄소년단은 그간 차별과 폭력에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음악과 콘텐츠로 전해왔다. 이들은 데뷔 초 썼던 가사가 여성혐오적이라는 지적을 받자 사과한 뒤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인권 감수성을 높여왔다. 공연에서도 문제가 된 가사는 고쳐 부르거나 아예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정바비의 혐의가 드러난 뒤에도 그가 쓴 곡을 신보에 재수록하기로 결정하면서 앞선 행보의 진정성도 의심받을 위기에 놓였다.
가요계가 높아진 성인지 감수성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지난해 11월 그룹 신화 멤버 김동완은 군 복무 중 성매수한 혐의를 받았던 그룹 엠씨더맥스 이수를 공개적으로 응원했다가 팬들이 반발하자 사과했다. 음원사이트 멜론은 지난해 음악 추천 서비스 ‘포 유’에서 집단 성폭행 등 혐의를 받던 가수 정준영의 노래를 이용자에게 추천해 도마 위에 올랐다. 멜론 측은 자동 로직 방식으로 인한 문제였다며 “물의를 일으킨 아티스트는 추천 대상에서 삭제하겠다”고 밝혔다. 가요기획사 FNC엔터테인먼트는 소속 가수였던 이종현이 메신저에서 불법 촬영물을 공유 받았다고 밝혀진 뒤에도 그를 퇴출하지 않다가, 이후 다른 논란이 불거지자 뒤늦게 계약을 해지해 지탄 받았다.
서정민갑 대중음악평론가는 “정바비가 작곡에 참여한 곡을 음반에 싣기로 한 결정에 팬들이 반발하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기획사 등 업계가 이런 반발을 존중하고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짚었다. 실제 빅히트뮤직은 논란이 인 뒤에도 별다른 입장을 내지 않고 방탄소년단 신보 홍보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온라인에선 정바비가 작곡한 곡을 방탄소년단이 공연에서 불렀다는 사실이 재조명되면서 여론이 나빠지고 있다. 서정민갑 평론가는 “폭력이나 인권 침해에 연관된 행위에 제대로 입장을 표명하지 않으면, 그 행위에 동조 혹은 방조한다고 여겨질 수 있다”며 “이로 인해 진실한 청춘의 초상으로 감동을 줬던 방탄소년단도 이미지에 흠집이 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