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에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유니버스’ 중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아무도 닥터 스트레인지가 이겼는지 졌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얼마나 극적으로 이겼는지, 어떤 새로운 기술을 보여줬는지도 더는 구경거리가 아니다. 400만명이 넘는 관객이 모두 닥터 스트레인지 팬이라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유니버스’(감독 샘 레이미)를 본 것도 아니다. 6년 전 개봉한 ‘닥터 스트레인지’ 1편을 복습하고, 디즈니+ ‘완다비전’, ‘왓 이프...?’를 모두 챙겨본 관객이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극장에서 닥터 스트레인지의 무엇을 보는 걸까.
완다(엘리자베스 올슨)와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는 꿈에서 깨는 모습으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유니버스’(이하 ‘닥터 스트레인지2’)에 첫 등장한다. 완다는 깨고 싶지 않은 꿈(가족), 스트레인지는 깨고 싶은 꿈(자신의 이면)이다. 완다는 꿈을 현 세계의 현실로 만들고 싶어 하고, 스트레인지는 꿈에서 본 모습과 다른 자신이 되고 싶어 한다. ‘닥터 스트레인지2’는 우리가 꾸는 꿈이 정신세계 밑바닥에 있는 개인의 무의식에서 발현된 것이 아니라, 멀티버스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내가 겪는 현실이라는 설정으로 서문을 연다. 무의식이 현실이 되자 평화는 깨진다. 두 사람은 시작부터 부딪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영화는 완다와 스트레인지 중 누가 더 강한지 보여주지 않는다. ‘닥터 스트레인지2’에서 두 사람이 직접 싸우는 장면은 처음 한 번뿐이다. 그 외 대부분 장면은 ‘드림 워킹’이라는 흑마술로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나’를 조종해 싸운다. 완다는 스칼렛 위치로 각성한 빌런처럼 보이지만, 사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악의가 없다. 멀티버스를 이동하는 능력을 가진 아메리카 차베즈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발생한 의견 차이일 뿐이다. 완다의 강력한 능력과 여러 히어로들의 화려한 액션은, 사실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는 공허한 싸움에 그친다.
카마르-타지를 장악한 완다가 굳이 웡(베네딕트 웡)과 함께 운다고어의 사원으로 향하는 장면은 이상하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지구-838 멀티버스로 이동했으나 비샨티의 책을 얻지 못하는 장면도 이상하다. 완다가 어디에 있든, 스트레인지가 다른 멀티버스에서 무엇을 하든 결말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직선으로 갈 수 있는 이야기를 멀리 돌아가게 만드는 비효율적인 플롯이다. 두 히어로의 여정을 전투를 위한 사전 단계가 아닌 스스로의 정체성을 탐구하며 걷는 고난의 길로 보면 이해가 된다.
‘닥터 스트레인지2’가 전투보다 더 공들여 다루는 건 스트레인지의 내면이다. 두 사람이 벌이는 유일한 대면 전투 장면에서 완다는 ‘왜 너는 되고 난 안 되냐’고 스트레인지의 기만을 지적한다. 과거 타노스와 대결에서 스트레인지의 선택으로 완다의 연인인 비전이 사망한 사건 얘기다. 스트레인지는 대의를 위해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 선택을 했다. 완다는 자신이 바라는 것 역시 대의가 될 수 있다고, 그가 만들어내는 희생이 스트레인지가 보여준 선택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스트레인지는 말을 잃는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인지 되짚는다.
‘닥터 스트레인지2’엔 우리가 아는 스트레인지를 제외한 세 명의 스트레인지가 등장한다. 셋은 각자 다른 교훈을 남긴다. 위험한 힘을 가진 아메리카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꽁지머리 스트레인지는 과거 자신의 모습이다. 인커전을 일으켜 세상을 멸망시킨 스트레인지는 크리스틴 팔머(레이첼 맥아담스)에 집착한 자신의 모습이다. 일루미나티와 함께한 지구-838 스트레인지는 거꾸로 자신이 위험한 힘을 가진 존재가 되어 희생된 경우다. 이 과정에서 어린 시절 동생의 죽음을 방치한 죄책감이 스트레인지를 희생에 예민한 인물로 만들었다는 걸 암시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비히어로의 희생으로 인한 죄책감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 소재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연인의 희생은 히어로로서 정체성을 각성하는 계기가 되곤 했다. 빌런과의 전투에서 발생하는 무고한 일반인들의 대규모 희생은 내부의 갈등을 일으켰다. 자신들의 존재와 행동, 선택이 평범한 사람들의 엉뚱한 희생을 낳는다는 죄책감을 마블 히어로들은 충분히 인지하고 의식한다. 타노스가 가장 끔찍한 빌런이었던 이유는 핑거 스냅이 현실 세계에 미친 영향이 역대 그 어떤 사건보다 컸기 때문이다. ‘닥터 스트레인지2’ 초반부에서 과거 의사 동료가 스트레인지에게 ‘정말 그 방법밖에 없었냐’고 묻는 건 단순히 웃으며 넘길 장면이 아니다.
‘닥터 스트레인지’ 1편에서 에인션트 원(틸다 스윈튼)은 닥터 스트레인지에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외과의사의 길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스트레인지는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두려움을 건방지고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덮었다. 1편에선 두려움의 실체를 확인하고 뛰어난 마법사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2편에선 잘못된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히어로로서 책임감을 되새기는 이야기가 펼쳐졌다. 결국 ‘닥터 스트레인지’ 솔로 무비는 깊숙이 숨겨둔 스트레인지의 두려움을 찾아내는 숨바꼭질에 가깝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다음엔 자기 자신의 어떤 내면과 싸워서 또 한 번 성장할지, 그가 가진 고유의 고민이 다음엔 어떻게 나타날지 기대되는 것 만으로도 이번 영화는 충분히 성공적이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