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티셔츠를 입은 청년들이 야외 공연장에 삼삼오오 모였다. 야광봉을 손에 든 채 둥글게 선 청년들 사이로 묘한 기대감이 흘렀다. “둘 중에 하나만 골라, 예스 오어 예스(Yes or yes)♬” 그룹 트와이스 노래 ‘예스 오어 예스’가 시작되자, 열댓 명 남짓의 청년들이 가운데로 뛰쳐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K팝 공연장 풍경이 아니다. 아이돌 오디션 현장도 아니다. 즉석에서 K팝 커버 댄스가 벌어진 곳은 필리핀 카비테주에 있는 아모란토 종합운동장. 레니 로브레도 부통령 지지자들이 지난 1일(현지시간) 이곳에서 벌인 선거운동은 한 마디로 ‘K팝 잔치’ 같았다.
대선 앞두고 K팝으로 뭉친 필리핀 Z세대
지난 9일 치러진 필리핀 대통령 선거가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의 승리로 끝났다. 그는 1965년부터 21년간 필리핀을 철권 통치한 고(故)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이다. 덕분에 새 대통령은 한국에서 ‘필리핀판 박근혜’로도 불린다. 마르코스 주니어에 맞서 격전을 치른 레니 로브레도 부통령은 인권 변호사와 시민운동가 출신이다. 필리핀 청년들은 마르코스 일가의 재집권을 막고 로브레도를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 유세에 뛰어 들었다.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TXT) 팬인 네드(20)도 그 중 하나다. 틴보그에 따르면 네드는 지난 3월 로브레도 유세 현장에 ‘두밧두 레니 레니’(Dubaddu Leni Leni)라고 적은 플래카드를 가져갔다. TXT 노래 ‘교환일기’의 부제 ‘두밧두 와리와리’를 패러디한 문구다. 네드뿐만이 아니다. 로브레도가 뜨는 곳엔 언제나 K팝 팬들이 뒤따랐다. 로브레도 지지자이자 그룹 엑소를 좋아하는 제인은 필리핀 방송사 ABS-CBN과의 인터뷰에서 “나이가 어려도 우리에겐 힘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 이곳(유세 현장)에 나왔다”고 했다.
K팝 팬덤 특유의 집단적·유희적 응원 방식은 로브레도 지지 운동에도 고스란히 이식됐다. 여러 자원봉사자로 이뤄진 단체 ‘K팝스탠포레니’(KpopStan4Leni·레니를 지지하는 K팝)는 대선 기간 로브레도 응원봉과 부채, 포토카드 등을 묶은 기념 상품을 판매해 선거운동 자금을 모았다. K팝 기획사가 팬클럽 회원들에게 제공하는 기념품 패키지에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로브레도의 생일이었던 지난달 23일에는 필리핀 전역에 있는 카페와 협업해 로브레도 이름을 새긴 컵 홀더를 지지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K팝 팬덤의 ‘생카’(생일 카페) 문화와 비슷한 이벤트다. 이들은 가짜 뉴스에 대항해 검색어를 정화하고, 로브레도 영상에 K팝 노래를 입혀 틱톡에 올리는 등 온라인 운동도 ‘K팝스럽게’ 펼쳤다.
K팝, 정치의 언어가 되다
K팝과 정치. 얼핏 물과 기름처럼 보이는 두 영역의 만남은 사실 해외에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역대 최연소로 칠레 대통령에 당선된 가브리엘 보리치는 2030 세대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선거 전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보리치 대통령의 지지율이 극우 후보인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에 밀리자, 칠레 청년들은 K팝을 매개로 뭉쳤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파시즘의 부상에 맞서 표를 던지고 단합하기 위해 모든 K팝 팬들을 소환하고 싶다.” 19~37세 K팝 팬 6명이 만든 단체 ‘보리치를 지지하는 K팝 팬들’(Kpopers por Boric)은 이렇게 호소했다. 보리치 대통령은 당선 이후 그룹 트와이스 멤버 정연과 스트레이 키즈 멤버 한의 포토카드를 들고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렸다. 자신을 지지해준 K팝 팬덤을 향한 감사 인사였다.
2020년 태국 시민들이 군부 정권 퇴진과 헌법 개정 등을 요구하며 벌인 시위에선 그룹 소녀시대의 데뷔곡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졌다. 희망 찬 멜로디와 씩씩한 가사, 무엇보다 ‘인투 더 뉴 월드’(Into the new world·세로운 세계로)라는 영어 제목이 1020 세대로 이뤄진 시위대 마음을 움직였다. 같은 해 치러진 미국 대선에선 K팝 팬들이 단체로 ‘노 쇼’ 운동을 벌여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유세 현장에 자리를 예약했다가 나타나지 않는 방식으로 걸림돌을 놓은 것이다.
해외에서 K팝은 다양성 정치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비영어권·비서구권 음악이라는 근본적인 속성이 K팝을 비주류·소수자 계층과 연결시켜서다. K팝 특유의 저항하는 이미지와 자기 긍정 등 건전한 메시지 또한 팬들을 각성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로브레도 유세에 참여했던 ‘아미’(방탄소년단 팬) 가르시아와 카란당은 “방탄소년단에게 영감을 받아 모두에게 더욱 안전한 공간(나라)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K팝 팬들도 최근 대형 기획사에 기후 위기 대응책을 요구하는 등 정치 운동에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K팝, 침묵 깨야 할 때”
이제 팬들은 K팝을 저항의 언어로 소환하는 단계를 지나, K팝 가수들이 정치적인 존재가 되기를 촉구한다. 2020년 확산한 BML(Black Lives Matter·흑인 인권 운동)부터 현재 진행형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까지, 여러 정치·사회 문제에 K팝 가수들이 목소리를 내달라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신기욱 스탠퍼드대 월터 쇼렌스틴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APARC) 소장 등 연구자들은 미국 외교전문지 디플로맷에 공동으로 기고한 글에서 “K팝 기획사들은 넓고 견고한 팬덤을 확보하기 위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를 언급하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하며 “K팝의 글로벌 영향력을 유지하고 싶다면 침묵을 깨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K팝이 (세계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려면 세계인들이 관심 갖는 심각한 문제에 K팝 아이돌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며 “K팝은 이제 인권운동을 지지할 수 있는 위치에 왔다. 이를 활용하는 일이 K팝이 더 존경받고 글로벌 영향력도 다지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