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 도는 헌혈의집…“O형 아니라 아쉬워요”

온기 도는 헌혈의집…“O형 아니라 아쉬워요”

6월14일은 헌혈자의 날…헌혈의집 가보니
코로나19로 혈액 수급 ‘직격탄’…아직 회복 중
10·20대 헌혈자 편중은 해결할 과제

기사승인 2022-06-14 06:10:05
13일 서울 마포구 소재 대한적십자사 헌혈의집 홍대센터에서 처음으로 헌혈을 했다.   사진=정진용 기자

“중학교 다닐때 몸이 안 좋아서 병원을 수시로 드나들던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혈액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저는 나이가 어려서 헌혈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 도와주지 못한, 지금은 세상을 떠난 그 친구를 생각하면서 시간이 될 때마다 헌혈하러 가요”


14일 ‘헌혈자의 날’을 하루 앞둔 13일. 서울 마포구 대한적십자사 헌혈의집 홍대센터에는 시민 발길이 계속 이어졌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는 평일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미 시민 2명이 헌혈 중이었다. 이날 홍대센터에서 헌혈을 하겠다고 사전에 예약을 해 둔 이는 23명이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가 안정세에 접어들면서 혈액 수급 현황에 혈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날 0시 기준 전체 혈액 보유량은 9.9일로 안정적이다. 일평균 적정 혈액보유량 기준인 5일분을 넘어섰다. O형은 8.6일, A형은 9.5일, B형은 11.2일, AB형은 11.3일분이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의료기관들은 혈액 수급에 애를 먹었다. 연초 7.6일분이었던 혈액 보유량은 지난 2월 한때 2.5일분까지 급감했다. 오미크론 확산으로 헌혈의집 방문자 급감 및 단체헌혈이 대폭 취소된 탓이다. 혈액보유량 1일 미만인 ‘심각’ 단계에 접어들게 되면 의료기관에 혈액 공급이 중단된다. 응급 수혈 환자가 발생해도 혈액이 부족해 수술을 제때 하지 못하고, 환자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홍대센터 내부에 비치된 혈액 보유 현황판.   사진=정진용 기자

“헌혈 가능한 당신은 선택 받은 자”…영국 3개월 체류시 평생 못해

“밥은 드시고 오셨죠? 잠은 잘 주무셨나요”
하고 싶다고 다 헌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건강 상태 체크에서 헌혈 가능 판정이 나와야 할 수 있다. 먼저 신분증을 확인한 뒤 사전 문진표를 작성한다. 이후 혈압을 재고 채혈을 통해 혈액형, 혈액 비중, 혈소판 수치 등을 확인한다. 기자는 혈압도 정상, 혈색소(철분 관련) 수치도 13.8로 양호했다. 건강진단 과정에서 혈색소 부족으로 헌혈을 못 하는 경우가 지난 2020년 기준 약 14만건에 이른다.

‘헌혈 초짜’에게 간호사는 전혈헌혈 320㎖를 추천했다. 헌혈은 크게 전혈헌혈과 성분헌혈 두 가지로 나뉜다. 전혈현혈은 혈액의 모든 성분(적혈구, 백혈구, 혈장, 혈소판)을 채혈한다. 성분헌혈은 뽑아낸 혈액 중에 혈장, 혈소판 등 필요한 성분만 여과해 채집하고 나머지 성분은 다시 혈관으로 주입하는 방식이다. 채혈 침대에 앉자 주의사항을 안내 받고 간호사가 주사기를 주입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약 10여분 했을까. 금새 320㎖ 팩이 두툼해졌다. 

기자는 헌혈이 처음이다. 고등학생 때 학교에 헌혈 버스가 찾아왔다. 당시 말라리아 관련 헌혈제한지역에 살던 터라 먼발치서 구경만 했다. 이후로도 계속 헌혈 가능 대상이 아닌 줄 알았다. 이제는 다르다. 헌혈제한지역에서 살았거나 복무했던 경우는 2년간, 여행했을 경우는 1년간 전혈헌혈 및 혈소판성분헌혈을 할 수 없지만 혈장성분헌혈은 가능하다. 현재 국내 말라리아 관련 헌혈제한지역은 경기 파주시·연천군, 인천 강화군, 강원 철원군이다. 

영국 등 유럽 국가에 체류한 경험이 있다면 예외다. 영국에서 3개월 이상, 프랑스나 유럽 국가에서 5년 이상 체류했다면 평생 헌혈이 불가하다. 변형 ‘크로이츠펠트-야콥병’이 유행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헌혈을 끝낸 뒤 받은 인생 첫 헌혈증서와 영화관람권, 편의점 쿠폰.   사진=정진용 기자

“O형 아니라 아쉬워요”…16번, 49번도 부족하다는 그들

이날 만난 시민은 모두 ‘헌혈 베테랑’들이었다. 서울 종로구에 거주하는 민숙현(39·여)씨는 이날이 헌혈 49번째다. 어린 시절 친구를 떠나 보낸 아픈 기억을 떠올리자 민씨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는 법적으로 헌혈이 가능한 나이가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만 16세가 된 첫날 아침, 미역국을 먹자마자 헌혈센터로 달려간 게 그의 첫번째 헌혈이었다. 민씨는 전혈헌혈이 아니라 혈소판성분헌혈을 주로 한다. 주기가 2주로 짧아 더 자주할 수 있어서다. 혈소판혈장헌혈이 혈액암 환자 수혈용에 쓰인다는 점도 또다른 이유다. 

남편과 함께 쉬는 날 센터를 찾은 자영업자 박모(42·여)씨는 코로나19 유행과 출산으로 2년여만에 헌혈을 하게 됐다. 이날로 박씨는 16번째, 남편은 22번째다. 박씨는 “병원에서 근무했을 때 혈액이 부족해 환자들이 제때 도움 받지 못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면서 “헌혈은 건강한 사람만 할 수 있는 특권이다. (수요가 많은) O형이면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을 텐데 아쉽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아이들이 빨리 커서 함께 헌혈하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왕준호(27)씨는 혈액이 부족하다는 뉴스를 보고 3달 전부터 주기적으로 헌혈에 참여하고 있다. 이번이 8번째다. 왕씨는 “헌혈을 하면 혈액검사를 할 수 있다. 건강 관리도 할 겸 겸사겸사 헌혈을 하고 있다”면서 “지금 젊고 건강할 때 남들을 돕자는 생각이 크다”고 했다.
홍대센터 앞에 헌혈을 독려하기 위한 ‘1+1’ 행사를 홍보물이 붙어있다.   사진=정진용 기자

저출산·고령화 목전인데…10·20대 집중된 헌혈자

혈액 수급 지표는 나아졌지만 현장에서는 아직 ‘회복 중’이라고 말한다. 홍대센터는 헌혈을 독려하기 위해 문화상품권, 영화관람권을 2매 주는 ‘1+1’ 행사를 진행 중이다. 지난 4월26일부터는 코로나19 확진자가 치료종료(완치) 후 10일부터 헌혈이 가능하도록 헌혈배제기간이 변경됐다. 기존에는 완치 후 4주 후부터 가능했다. 혈액 수급 위기로 확진자 헌혈배제기간 기준 완화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홍대센터의 간호사는 “코로나19 유행 이후 지난 2년간 헌혈자 숫자가 반으로 뚝 떨어졌다”면서 “지난달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된 뒤부터 많이들 오고 계신다. 예전의 일상으로 회복하는 과도기에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정부에서 혈액 안정 수급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헌혈자 수는 127만2178명으로 국민 헌혈률은 5.04%다. 선진국에 비해 낮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헌혈자 중 10~20대가 65%에 달한다. 특정 연령대에 편중됐다. 저출산, 고령화로 10~20대가 지속 감소하는 만큼 혈액의 안정적 수급을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또 최근 3년간 혈액 보유량 ‘관심’(3~5일분) 일 수가 증가 추세다. 지난 2017년 57.8%(211일), 2018년 69%(252일), 2019년 84.9%(310일)였다. 정부가 5년마다 발표하는 ‘혈액관리 기본계획(2021~2025)에서는 헌혈인식 제고를 위한 환경 조성, 헌혈자에 대한 충분한 예우로 헌혈의 사회적 가치에 공감하는 사회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고 언급됐다. 

민씨는 “백혈구 헌혈을 한 적이 있는데 수혈자가 경과가 좋았고 결국 퇴원했다. 한 달에 한번씩 잘 지내고 있다고 연락이 온다. 보람이 남다르다”면서 “헌혈을 망설이는 분들에게 생각보다 그렇게 겁나는 일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미소 지었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정진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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