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뮤지컬계에 없는 것 [친절한 쿡기자]

한국 뮤지컬계에 없는 것 [친절한 쿡기자]

기사승인 2022-06-28 16:43:03
뮤지컬 ‘엘리자벳’ 10주년 기념 공연에 캐스팅된 배우들. EMK뮤지컬컴퍼니

“그녀는 이제 단지 그저 흔한 싸구려 키치(가짜 혹은 사이비).” 10주년 기념 공연으로 돌아오는 뮤지컬 ‘엘리자벳’ 논란을 보고 있노라니, 이 작품에 등장하는 노래 ‘키치’의 가사가 저절로 떠오릅니다. 1세대 뮤지컬 배우들이 제언한 논의는 가라앉고, 자극적인 스캔들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자벳’과 뮤지컬 배우 옥주현을 둘러싼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옥주현이 자신과 친한 배우를 ‘엘리자벳’ 주요 역할에 꽂아 넣었다는 의혹에 이어, 옥주현이 공연 스태프에게 ‘갑질’했다는 주장이 온라인을 시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옥주현과 ‘엘리자벳’ 제작사 EMK뮤지컬컴퍼니 측은 캐스팅 관여 의혹을 여러 번 부인했지만, 여론 재판에선 이미 유죄 판결이 내려진 모양새입니다.

‘인맥 캐스팅’. 일견 불쾌한 인상을 주는 단어입니다. 수백 명이 만드는 대형 뮤지컬 주연 배우를 인맥으로 캐스팅하다니요. 그런데 잠깐. 뮤지컬만의 문제일까요. 영화와 드라마, 예능계에선 ‘○○○ 사단’이란 말이 흔할 정도로 인맥이 중요하지 않았던가요. 지혜원 경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배우가 다른 배우를 추천하거나 캐스팅에 의견을 내는 행위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렵습니다. 이번 논란은 소수의 배우들이 시장을 독과점하는 구조, 즉 기회의 균등이 보장되지 않는 산업 구조로 인한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라고 보는 게 더욱 적절합니다.”

뮤지컬 ‘레베카’ 공연 장면.   EMK뮤지컬컴퍼니

뮤지컬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아시겠습니다만, 대형 뮤지컬 주인공에 캐스팅되는 배우들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이미 티켓 파워가 입증된 몇몇 배우들이 주인공을 독식하는 형태죠. 이들 가운데선 두 작품에 동시에 출연하거나 공연과 연습을 병행하는 배우들도 적지 않습니다. 지 교수는 “미국 브로드웨이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 뮤지컬 시장만의 독특한 구조”라고 짚었습니다. 좁은 관객층을 중심으로 스타 배우 팬덤에 의지해 짧은 시간 급성장한 한국 뮤지컬 시장의 이면이라는 겁니다.

문제는 이 소수 인원을 제외한 다른 배우들을 보호할 장치가 마땅치 않다는 데 있습니다. 스타 배우들에게 권력이 쏠린 탓입니다. 해외는 어떨까요. 브로드웨이에는 배우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이 있습니다. 조합원에게 오디션 기회를 열어주고 제작사와 최저임금을 협상하는 조직입니다. 덕분에 브로드웨이는 제작자나 스타 배우 등 특정한 소수가 수익을 쓸어가기 어려운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다고 합니다. 앙상블 배우들에 대한 임금 체불이 몇 년에 한 번씩은 벌어지는 한국과는 분위기가 영 딴판입니다.

스태프들도 울타리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옥주현의 갑질 의혹 가운데선 그가 습도를 조절하려 연습실 히터를 틀지 못하게 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지 교수는 말합니다. “제작사는 습도 조절 등 컨디션 관리에 관한 내용을 왜 계약서에 명시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반문해야 한다”고요. 원칙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고충을 처리하다 보니, 배우는 몸을 관리하기가 어렵고 스태프들은 근무 환경이 열악해지는 이중고를 낳는 겁니다. 지 교수는 “작품 완성도 향상에 들어가는 인력과 비용을 고려해 예산을 재분배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스타 배우에게 지급되는 개런티가 너무 높다는 공감대가 만들어지면, 업계가 개런티를 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스타 배우는 있지만 노동조합은 없습니다. 원칙은 연약하고 구제는 불가합니다. 세계 4대 뮤지컬 시장으로 꼽히는 한국 뮤지컬 업계의 현실입니다. “종사자 전체가 동의할 수 있는 원칙을 세우고 이를 수행할 수 있는 기구, 분쟁을 중재하고 해결할 수 있는 기구가 한국 뮤지컬 업계에 없다”는 지 교수의 지적이 씁쓸한 뒷맛을 남깁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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