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과 어린아이들은 흔히 도로에서 용변을 봄으로써 길이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실은 길 전체가 화장실이라고 할 정도이지만 다행히도 매년 우기가 오면 자연의 덕으로 씻겨 나간다.”(의사 셔우드 홀)


미국 의사 호튼은 남자 의사가 여성 환자의 진맥조차 할 수 없는 조선 현실에 투입된 최초의 근대 여의사였다. 유럽인이 동양을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보았던 점을 고려하더라도 조선은 ‘너무나도 비보건적이며 비위생적’이란 지적이 맞다.
의사 헌터 웰스는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을 벌어지던 그해(1894년) 4000여 건의 환자를 치료했는데 대개가 비위생적인 식습관에서 오는 소화불량과 말라리아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콜레라 또한 말라리아와 함께 조선의 대표적 역병이었다. 1886년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일기에 ‘도성 안에서 하루에 500명이 죽는다. 하늘은 곡하는 소리로 가득하다. 며칠 사이 3000여 명이 성문 밖으로 실려 나갔다. 정부도 마비 상태다. 왕은 외국인 약품을 호소한다’라고 남겼다.
이 비참한 현실에 미국 및 유럽의 의사들이 박애 정신으로 뛰어들어 근대식 병원을 건립하고 민중 구제에 나섰다. 기왕의 왕립병원 제중원을 서울 재동(현 헌법재판소 자리)에서 구리개(현 을지로 입구 하나금융그룹 일대)로 옮기면서 ‘대민구료사업’의 전진기지로 삼은 것이다.
1885년 4월 조선 정부는 서양 의학 병원 광혜원(곧 제중원 명칭 변경)을 설립했으나 대민구제보다 왕실 사람이나 권력자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왕립병원에 지나지 않았다. 광혜원은 갑신정변(1884년) 때 난자당한 권력자 민영익을 서양 의사 알렌이 집도해 살려내고 보상으로 얻어낸 병원이었다.
19세기 말 전염병이 도성을 위협하자 조선 정부는 미국 북장로회 조선선교부와 제중원 확대 이전에 합의하고 1887년 초 왕실 소유 부지인 구리개로 옮긴 것이다. 이 병원에 엘리트 의사 헤론이 투입됐다.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제수됐던 제2대 제중원장이었다. 이어 3대 빈튼과 4대 에비슨이 제중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한국 근대 의학의 기틀이 마련된다.
구리개 제중원은 1894~1895년대 감염병이 전국을 휩쓸 때 공공의료 기관으로 자리매김한다.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콜레라와의 전투’라고 할 정도로 콜레라가 만연했을 때였다. 산 사람도 격리를 위해 동대문과 광희문 밖, 서대문 밖 애오개 공동묘지에 내버리던 시절이었다.
콜레라 확산은 우리 땅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여파였다. 일제 육군부대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청나라군에도 퍼졌고 급속하게 만주와 평양에서 남으로 번져 나가 도성을 위협했다.

조선 백성의 역병 대응은 ‘부모의 병은 자식이 피하고, 자식의 병은 부모가 피하여 교외로 도망치는 것’(일본 측 자료)이었다. 에비슨은 ‘날 음식 먹지 말고, 음식 먹기 전에 반드시 손과 얼굴을 씻어야 한다’ 등의 내용을 담은 소책자를 배포했다.
하지만 우리의 무지는 근대 의학을 믿지 못했다. 정부 차원에서 성 밖에 병막을 지어 격리하거나 무당을 시켜 귀신을 물리치는 제사를 독려하는 정도였다. 도성 일대서만 수만 명이 죽었다. ‘위생행정’이란 개념이 이 무렵 생겼다.
또한 천연두(호환마마)도 공포의 질병이었다. 이 병에 걸린 아이가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는데도 도성 수구문 밖으로 버렸다. 그렇게 시신방치소에 버려진 아이 가운데 한 소녀가 스크랜턴 대부인(이화학당 설립자)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구출됐는데 이 아이가 이화학당 첫 입학생 4명 중 1명이었다. 1897년 에비슨은 “천연두 접종이 어느 정도 일상화되었다”라고 말했다. 제중원이 있는 한양에서는 퇴치 가능한 질병으로 인식됐다.
그때 구리개 제중원은 6600㎡~1만6000㎡(2000~5000평) 넓이에 40여 개의 병상을 갖춘 의료단지였다. 김구의 부인 최준례가 병원 허드렛일을 하는 어머니와 함께 이 원내에서 자랐고, 도산 안창호가 제중원에서 결혼했던 근대문명의 상징 공간이었다.
이러한 근대 의학과 구제병원의 상징 구리개 제중원은 세브란스라는 미국 독지가가 조선인을 위한 현대식 병원 건립을 위한 기부에 따라 1904년 경성역(서울역) 앞으로 이전하면서 새로운 인술 현장이 된다.

목사의 아들로 뉴욕의대 출신 엘리트였다. 그는 모국의 편안함을 버리고 1885년 6월 20일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해 고종의 어의와 제중원 2대 원장이 됐다. 입국 5년 되던 해 창궐한 역병에 죽어 나가는 환자를 돌보다 이질로 순직했다.
당시 조선에 들어온 서양인들은 풍토병에 시달렸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여름이면 이를 피하고자 남한산성에 모여 공동체 생활을 했다. 1890년 여름 도성 안에 어김없이 전염병이 돌았고 헤론은 남한산성 집결일 마지막까지 환자를 돌봤다. 장맛비가 억수 같이 오던 날 비를 맞고 남한산성에 당도한 헤론은 고열에 시달렸다. 그리고 후송되었으나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캐나다 출신의 의사. 한국의 근대 의학과 근대 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선구자이다. 토론토의대를 졸업하고 의대 교수와 토론토 시장 주치의로도 활동했다. 1892년 언더우드(연세대 설립자)를 선교 모임에서 만나 조선 의료 현실을 듣고 1893년 조선행을 택했다. 입국 후 왕립병원이었던 제중원을 미국 북장로회 조선선교부로 이관받아 구제병원으로 운영했다. 구리개 제중원이다.
또한 1904년에는 서울역 앞으로 이전시켜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언더우드의 조선기독교학교를 연희전문학교(연세대 전신)로 설립 인가받아 근대 교육에 이바지했다.
전정희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