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째 동결 의대 정원…“대리처방·수술 일어날 수밖에”

17년째 동결 의대 정원…“대리처방·수술 일어날 수밖에”

정원 4000명 늘리려 했지만, 의사들 반대에 좌초
의료기관 95개 중 60개 “대리 수술·처치 여전”
“대리수술·처방 일상…의사도 의사인력 확충에 동참을”


기사승인 2022-10-01 06:47:01
보건의료노조가 30일 ‘의사 인력 실태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과 증언대회’를 열었다.   보건의료노조

#"환자들이 의사를 만나기 어려워요. 부족한 의사를 대신해 PA(Physician Assistant·진료보조인력)이 그 자리를 채우고, 의사 ID를 이용해 유령처럼 일하고 있습니다. 인턴과 PA가 실제 주치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당직근무를 서는 의사가 부족하여 내과환자가 아픈데 정신과의사 등 관련 없는 의사가 담당해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의사가 없어 남은 의사들의 당직근무가 빈번해지고, 몇몇 과에서는 의사들이 당직을 서지 않고 PA인력이 당직을 섭니다”

의료기관 97개 중 73개(75.25%)가 ‘의사 ID·비밀번호를 공유해 의사가 아닌 간호사 등이 처방전을 대리 발급하는 일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고 답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대리 수술·처치가 발생한다고 답한 의료기관도 95개 중 60개(63.15%)에 이르렀다. 노동단체는 근본 원인은 의사 부족이고 인력 확충을 위해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정원 현원 격차 최대 106명 달하는 국립병원도

의대 입학 정원 3058명은 17년째 동결된 상태다. 정부는 2022년부터 10년간 한시적으로 의과대학생을 매년 400명씩 총 4000명을 추가 선발하는 방안을 지난 2020년 발표했다. 하지만 의료계는 총파업에 돌입했고 의대생의 의사 국가시험 응시 거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후 2년째 논의가 멈춘 상태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은 30일 산하 99개 의료기관 의사인력 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달 16일부터 지난 2일까지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에 참여한 병원은 사립대병원 29개, 국립대병원 10개, 특수목적공공병원 22개, 지방의료원 20개, 민간중소병원 18개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원 대비 재직 중인 의사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한 국립대병원의 경우 정원과 현원 격차가 최대 106명에 달했다. 각 병원에서는 부족한 의사를 대리하는 PA를 사용하고 있는데 최대 200명을 고용한 의료기관도 있었다. PA인력을 주로 사용하는 의료기관은 사립대병원과 국립대병원이었다. 응답한 27개 사립대병원의 PA인력은 총 2107명으로 1개 의료기관 당 평균 78명이었다. 

보건의료노조 실태조사 결과.

대리처방 잘못돼 항암제 2배 먹은 환자…의사들도 번아웃 호소

의사 고유업무의 타 직종 전가는 불법이지만 버젓이 일어난다. 환자 대면 진료 외 다른 의사 고유업무(대리 처방, 대리 시술, 검사 결과 확인, 진료기록 작성, 동의서 작성, 정규적으로 시행되는 검사 및 시술 설명, 협진의뢰) 거의 모두가 PA 몫이 된다는 게 현장 목소리다.

대리처방·수술은 의료사고로 이어진다. PA가 대리처방을 잘못해 환자가 항암제를 2배로 먹게 된 사례, 수술 및 시술을 의사가 해야 하는 데 PA나 의료기기 판매자가 대리 수술을 한 사례까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의사 업무를 대신하다가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그 책임까지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환자들의 피해도 막심하다. 환자들이 골든타임을 놓치고 병원을 찾았다 되돌아가거나, 먼 거리의 다른 의료기관으로 이동하는 일이 빈번하다. 치아가 목 안까지 들어가 기도 폐쇄 우려가 있는 환자가 응급실에 왔지만 야간 당직의사가 없어 진료하지 못한 채 그냥 귀가시켰던 사례도 조사됐다.

의사 인력 부족은 의사들에게도 장시간·고강도 노동, 업무 과중, 수면 부족, 번아웃을 초래하고 있다.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3일에 한 번꼴로 당직을 서거나 연간 100일이 당직이 의무인 의사도 있었다. 주6일 근무에 잠자는 시간이 2~3시간밖에 안 되는 의사들도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일부 진료과에서는 당직의 부족으로 36시간 연속 근무도 이뤄진다.

의료기관에서는 의사를 구하려 고액연봉을 제안하고, 매년 수천만원의 성과급을 지급하지만 이는 일반 노동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준다는 부작용으로 이어졌다.

서울 한 대학병원.   사진=박효상 기자

“의사 일은 의사가, 간호사 일은 간호사가 해야”

의사들이 병원을 떠나는 이유는 지리적 위치와 생활여건, 열악한 근무조건과 처우, 낮은 임금, 개원, 각종 갈등관계, 전망 부재 등으로 다양했다. 우선 대도시에 비해 교육·문화생활·편의시설이 매우 열악한 지방 소도시로 가려 하지 않고, 지방병원에서 근무하다가도 아이들의 교육과 본인의 역량 개발 및 미래 비전을 위해 지방을 떠나 대도시권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한 노동자는 “의사가 부족하니 당직 의사는 경험이 없는 신규 의사가 맡게 된다. 백명 넘는 환자를 혼자서 감당해야 하니 환자의 응급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부족한 의사로 인해 대리 수술, 대리 처방은 일상이 되어버렸다”면서 “의사들도 고된 업무를 동료 의사와 나눠서 할 수 있도록, 의사 일은 의사가, 간호사 일은 간호사가 할 수 있도록 의사인력 확충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다.

보건의료노조는 △의대 정원 확충 △기피 필수 진료과에 대한 실효성 있는 지원정책 마련 △불법 의료 근절과 직종간 업무 범위 명확히 규정 등 5가지를 요구했다.

나순자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은 “우리나라 최고 병원에서 직원이 일하다 쓰러졌는데 치료할 의사가 없어서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의사 확대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라며 “의사 인력 확충 없이 환자 안전, 공공병원 확충이나 한국의 의료의 미래는 없다. 내달 12일 노동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비롯해 의사 인력 확충 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이겠다”고 강조했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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