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어공주를 돌려 달라고? [낫 유어 에리얼①]

내 인어공주를 돌려 달라고? [낫 유어 에리얼①]

기사승인 2022-10-01 06:00:06
편집자 주 : [낫 유어 에리얼]은 흑인 인어공주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쓴 ‘나의 에리얼이 아니다’(#NotMyAriel) 해시태그를 뒤집어 ‘너의 에리얼이 아니다’라는 의미로 쓴 제목입니다. 나의 에리얼은 백인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타당한지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영화 ‘인어공주’ 포스터

몇 년 전 할리우드에서 백인 배우만 주인공으로 캐스팅해 다른 인종을 지운다는 화이트워싱(Whitewashing) 논란이 불거졌다. 백인인 배우 틸다 스윈튼이 마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감독 스콧 데릭슨)에서 원작엔 티베트인이었던 에이션트 원 역할을 연기했고, 스칼렛 요한슨이 영화 ‘공각기동대’(감독 루퍼트 샌더스)에서 원작 애니메이션엔 일본인으로 등장한 쿠사나기 역할을 맡았다. 백인 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고 대중이 좋아한다는 믿음이 깨졌다. 이제 달라져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다. 할리우드 영화와 드라마에 다양한 인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거꾸로 이젠 할리우드에서 흑인 배우만 주인공으로 캐스팅해 다른 인종을 지운다는 블랙워싱(Blackwashing) 논란이 불거졌다. 넷플릭스 ‘브리저튼’에선 흑인 배우 골다 로쉐벨이 19세기 영국 왕비 역할을 연기했고, 영화 ‘알라딘’(감독 가이 리치)에선 흑인 배우 윌 스미스가 램프의 요정 지니 역할을 맡아 논란을 불렀다. 내년 5월 개봉하는 디즈니 실사 영화 ‘인어공주’(감독 롭 마샬)에선 원작엔 백인이었던 인어공주 역할에 흑인 배우 핼리 베일리가 캐스팅됐다. 지난 10일 흑인 인어공주 모습이 처음 공개된 ‘인어공주’ 예고편엔 댓글 25만개가 달렸고, SNS엔 해시태그 ‘나의 에리얼이 아니다’(#NotMyAriel)를 달고 항의하는 글이 쏟아졌다.

흑인 인어공주에 대한 비판은 온건파부터 강경파까지 다양한 결로 등장했다. 디즈니의 정치적 올바름(PC)이 지나쳤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지키는 것이 자칫 작품 완성도를 낮출 수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원작 설정을 바꾸면서까지 흑인 배우를 써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반응이 많다. 오히려 백인을 역차별하는 것 같다는 조롱과 흑인 배우의 외모가 문제라고 지적하는 극단적인 댓글까지 등장했다.

영화 ‘인어공주’ 예고편. 디즈니 유튜브 캡처

흑인 인어공주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엔 자신의 기억 속 백인 에리얼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다. 만약 흑인 인어공주가 등장하는 ‘인어공주’가 원작이 없는 새 작품이었으면, 원작 ‘인어공주’를 대중이 잘 몰랐으면 생기지 않았을 논란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중이 원하는 콘텐츠 대신 옳다고 여기는 의식을 콘텐츠에 구현하는 창작자에게 불만이 쌓여 넘지 말아야 할 영역을 침범했다고 느낀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좋고 싫음을 넘어 디즈니의 선택이 잘못이라고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작품이 불쾌감을 주는 것처럼, 흑인 인어공주가 대중의 기억을 왜곡하는 것에 불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불만이나 아쉬움을 드러내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인어공주’가 개봉하는 2023년에도 누군가는 사라지는 LP판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고, 모바일 인스턴트 메신저가 아닌 손 편지 감성을 그리워할 것이다. 흘러간 과거의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지금 눈앞의 일과 과거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다가오는 미래를 보지 못하는 건 문제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디즈니 작품이자 처음 보는 ‘인어공주’가 흑인 인어공주인 이들이 살아갈 미래에 대한 얘기다. 자신이 사는 시간대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면, 타인에 의해 기억 왜곡을 당하는 것 같은 판단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원작에 문제가 없는지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화이트워싱 논란 이전엔 백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많은 대중이 감상한 1989년 ‘인어공주’ 속 인어공주가 백인인 것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한쪽으로 치우친 배경에서 등장한 백인 인어공주를 기준으로 삼는 건 이상하다. 그 이상함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 옳다는 근거가 될 순 없다.

원작 인어공주가 백인인지, 흑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어공주가 어떤 피부색을 가져도 괜찮은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PC 묻어서 안 본다’는 고루한 취향 고백은 가능하지만, 인어공주는 반드시 백인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적어도 영화 ‘기생충’과 ‘미나리’,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미국 진출에 기뻐한 국내 관객들은 자신이 왜 블랙워싱에 거부감을 느끼는지 다시 돌아봐야 할 일이다. 훼손 위기에 놓인 백인 인어공주의 기억을 지키고 싶은 이들의 아쉬움을 존중한다. 아쉽게도 시간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지만, 과거에 머물고 싶을 순 있으니.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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