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도 한조각 추억으로, 3년 만에 돌아온 ‘슬라슬라’

비바람도 한조각 추억으로, 3년 만에 돌아온 ‘슬라슬라’

기사승인 2022-10-11 10:00:03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라이브’에서 마지막 간판 출연자로 등장한 미국 가수 라우브. 프라이빗커브

지난 8일부터 10일까지 열린 음악 축제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라이브’(이하 슬라슬라)를 반긴 건 뜻밖에 찾아온 추위였다. 9일 서울에 내린 비는 기온을 한 자릿수로 떨어뜨렸고, 설상가상 이튿날 불어 닥친 바람은 살을 에듯 날카로웠다. 하지만 3년 동안 ‘슬라슬라’를 기다린 음악 애호가들에게 비바람은 그저 한 조각 추억에 불과했다. 라우브, 제레미 주커, 앤 마리 등 젊은 팝스타들이 무대에 오르자 서울 올림픽공원 88잔디마당을 채운 인파는 파도처럼 넘실댔다.

“여러분이 절 행복하게 만드네요. 오늘 밤은 아주 특별하군요!” 공연 마지막 날인 10일 간판 출연자로 나선 라우브는 이렇게 말하며 미소 지었다. 그룹 방탄소년단과 협업해 한국 팬에게도 잘 알려진 그는 이날 최신곡 ‘올 포 낫싱’(All 4 Nothing)부터 히트곡 ‘아임 소 타이어드…’(I’m so tired…)까지 23곡을 부르며 때 이른 추위를 녹였다. 2019년 서울재즈페스티벌 출연 이후 3년 만에 한국 팬들을 마주한 그는 “서울에 와서 행복하다”며 “공연을 하다보면 새로운 나를 발견한다. 이런 기회를 내게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라우브 공연에 깜짝 등장한 미국 가수 제레미 주커(오른쪽). 프라이빗커브

라우브의 공연이 시작된 시간은 땅거미가 완전히 진 뒤인 오후 8시30분. 미국에서 온 금발 청년은 가을밤의 어둠을 도화지로 삼았다. 핀 조명을 받으며 등장한 그는 무대 뒤 전광판에 때론 보름달을 띄워두고, 또 때로는 번개가 떨어지는 폭풍을 펼쳐둔 채 노래했다. 한국에서도 크게 히트한 ‘패리스 인 더 레인’(Paris In The Rain)을 부를 땐 빗방울 머금은 창문으로 전광판을 꾸몄다. 이따금씩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흡사 밤하늘 별똥별처럼 보였다. “올 아이 노우 이즈 우-우-우”(All I know is ooh-ooh-ooh) 라우브가 이렇게 노래를 시작하자 곳곳에서 ‘떼창’이 터져 나왔다.

관객들은 기꺼이 무대의 일부로 녹아들었다. 통기타를 둘러맨 라우브가 멜랑콜리한 감성의 ‘브리드’(Breath)를 부르자 휴대전화 불빛을 켠 채 양팔을 좌우로 흔들며 금빛 물결을 만들었다. 라우브 이름이 크게 적힌 플래카드를 흔드는 팬도 보였다. 라우브는 열정적인 무대 매너로 화답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필링스’(Feelings)를 부르고, ‘드럭스 & 디 인터넷’(Drugs & The Internet) 무대에선 냅다 드러누워 노래하기도 했다. 히트곡 ‘아임 소 타이어드’를 부를 땐 앞서 공연한 가수 제레미 주커가 깜짝 등장해 열기를 더했다. 라우브는 “너무 추워서 따뜻한 수프가 필요하다”고 너스레를 떨다가도 “곧 다시 돌아올 테니 공연이 끝나가는 것을 슬퍼하지 말라”고 팬들을 다독였다.

영국 싱어송라이터 앤 마리. 프라이빗커브

하루 전날 공연장을 다녀간 앤 마리는 흠 잡을 데 없는 라이브로 한국 관객의 마음을 훔쳤다. 한국에서 ‘국민 팝송’으로 불린 히트곡 ‘2002’를 비롯해 ‘락어바이’(Rockabye), ‘브리싱’(Breathing), ‘퍼펙트 투 미’(Perfect To Me) 등 20곡을 열창했다. 그는 관객과 소통하는 데도 열심이었다. “안녕하세요” “재밌어요” “보고 싶었어요” 등 한국어로 또박또박 인사말을 건넸다. 종일 내린 비에 바닥은 진흙탕이 되고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관객들은 개의치 않았다. “아 유 콜드”(Are you cold·추운가요)라는 질문엔 “노”(NO·아니요)라고 우렁차게 대답하더니, 춤을 추고 싶으냐는 말엔 입 모아 “예!”를 외쳤다.

영국에서 나고 자란 앤 마리는 한국 팬들과 인연이 각별하다. 그는 2019년 음악 축제 ‘홀리데이 랜드 페스티벌’ 간판 출연자로 섭외돼 한국을 찾았지만 정작 무대에는 오르지 못했다. 당시 주최 측은 “우천으로 인해 뮤지션 요청으로 공연이 취소됐다”고 알렸지만, 앤 마리는 이에 반박하며 자신이 머물던 호텔에서 무료 게릴라 공연을 열었다. 이후 3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은 그는 “내일은 공연이 없으니 목이 쉬어도 상관없다”며 열정을 불태웠다. 지난 2월 에세이 ‘알잖아, 소중한 너인걸’(You deserve better)을 내며 작가로도 데뷔한 그는 7일 서울 한남동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서 북토크도 열었다.

이밖에도 미국 인디 팝 밴드 레이니를 비롯해 조나스 블루, 톤즈 앤 아이, 벤슨 분, 핀 애스 큐, 페더 엘리아스 등 해외 가수들이 ‘슬라슬라’를 통해 한국 관객을 만났다. 한국 가수로는 그룹 레드벨벳 멤버 웬디, 가수 백예린이 속한 밴드 더 발룬티어스, 가수 이하이, 죠지가 출연했다. ‘슬라슬라’를 주최한 공연 기획사 프라이빗커브에 따르면 3일 간 약 3만 명이 공연장에 다녀갔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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