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한자로 문신을 새긴 80대 노인 필주는 차 사고 직후 그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을 다룬 영화 ‘메멘토’(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주인공처럼 문신을 읽으며 알츠하이머 증세를 극복한다. 그가 원하는 건 복수.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긴 이들을 한 명씩 찾아가며 생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영화 ‘리멤버’(감독 이일형)는 제목처럼 잃어버린 기억,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은퇴 후 10년 넘게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필주(이성민)는 동료들에게 프레디로 불리며 시그니처 손 인사를 나눌 정도로 정정한 80대 노인이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필주는 60여 년을 계획한 복수를 시작한다. 필주의 부탁으로 일주일만 운전을 도와주기로 한 필주의 절친 인규(남주혁)는 꿈에 그리던 고급 스포츠카의 등장에 놀란다. 잔뜩 신난 인규에게 필주는 일단 병원으로 가달라고 부탁한다.
‘리멤버’는 필주의 가이드를 따라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친일파의 행각을 현재로 소환한다. 필주에겐 60년이나 지난 일을 어제 일처럼 기억할 만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80년 전 이야기를 보는 관객들은 그렇지 않다. 필주를 화자(영화), 인규를 청자(관객)로 설정한 ‘리멤버’는 관객들을 상대로 이미 지나간 오래된 일을 왜 꺼내는지 설득한다. 필주가 잔소리를 일삼는 고지식한 어른이 아니고, 그가 오랜 시간을 기다렸던 이유가 있다는 걸 하나씩 드러내며 호감을 심는다. 결정적인 건 그가 끄집어낸 역사다.
‘리멤버’가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힘의 원천은 역사에서 나온다. 필주라는 매력적인 개인의 호감에서 들여다보기 시작한 이야기 속엔 잠깐만 봐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빌런들이 가득하다. 그들이 영화를 위해 지어낸 인물이 아니란 걸, 필주가 겪은 일이 한 명의 개인에게 일어난 우연한 사건이 아니란 걸 영화를 보는 모두가 안다. ‘한산: 용의 출현’을 보면서 이유 모르게 울컥해지고, ‘범죄도시2’를 보면서 속이 시원한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친일파들의 뻔뻔한 행적이 한국 관객의 본능을 건드린다. 별다른 갈등 없이 복수를 이어가는 필주의 이야기를 통해 마치 영화 밖 현실은 영화와 얼마나 다른지 묻는 것 같다.
필주의 사연, 필주의 비밀, 필주의 활약에 시선이 집중되는 영화다. 배우 이성민이 80대 노인 분장을 했다는 사실도 잊고 빠져들게 하는 힘이 대단하다. 정작 더 중요한 건 인규다. 별다른 고민 없이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필주가 장르가 주는 쾌감을 온전히 전달한다면, 인규는 이렇게 달려가도 되는지 의심하고 고민하며 제동을 건다. 철저히 개인의 이익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그보다 더 큰 걸 발견하는 이야기로 역전되는 순간, 영화는 완성된다. 필주의 마지막 복수 장면은 관객들에게 주는 선물 같은 판타지에 가깝다. 신들린 듯 필주에 몰입한 배우 이성민의 연기는 언제나처럼 놀랍지만, 이야기를 땅에 발붙이게끔 동분서주한 배우 남주혁의 연기도 주목할 만하다.
2015년 제작된 독일 영화 ‘리멤버: 기억의 살인자’(감독 아톰 에고이안)가 원작이다.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 가족을 몰살한 나치 군인을 향해 복수하는 원작 설정을 한국 역사에 맞게 바꿨다. 2016년 개봉해 970만 관객을 모은 ‘검사외전’을 연출한 이일형 감독의 두 번째 영화다. 2년 전 촬영을 마쳤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여파로 개봉이 미뤄졌다.
오는 26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