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 꾀죄죄한 몰골의 두 남녀가 낄낄대며 노래를 주고받는다. “공무원 어때. 아주 든든해” “꽉 막혔잖아” “사채업자 드려볼까” “지독하게 거칠고 더럽게 질겨” 맞선을 보려 사전 탐색이라도 하는 걸까. 둘의 대화는 그 소재를 알면 섬뜩해진다. 공무원, 사채업자 등 언급된 이들은 모두 파이 속을 채우는 재료. 남녀는 인육으로 파이를 만들어 판다. 다음 달 1일 서울 샤롯데시어터에서 개막하는 뮤지컬 ‘스위니토드’의 주인공 스위니 토드와 러빗 부인이다.
배우 전미도가 6년 만에 러빗으로 돌아온다. 똑똑하고 자상한 신경외과 의사(tvN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반전 일탈이다. ‘변신의 귀재’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지난 17일 서울 도곡동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전미도는 “저를 채송화로 알고 계신 분들에게 다양한 면을 보여줄 기회”라고 말했다.
‘스위니토드’는 누명을 쓰고 옥살이한 스위니 토드가 세상에 복수하는 이야기다. 파이 가게 사장인 러빗은 토드를 남몰래 흠모하며 그를 돕는다. 배경은 빈민이 넘쳐나고 도덕이 무너진 산업혁명 이후 영국. 가난에 쪼들리던 러빗은 인육 파이로 큰돈을 번다. 러빗은 억척스럽고 사악하지만 쉽게 미워할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불편한 욕망”을 품었다는 점이 보편의 인간과 비슷해서다. 전미도는 “러빗은 먹고 살려다 윤리의식까지 흐려진, 우리 주변에도 있을 법한 인물”이라며 “무서운 캐릭터지만 사랑스럽게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6년 전보다 러빗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어요. 예전엔 러빗을 캐릭터로만 받아들였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한 인간이 보여요. 절박한 상황에서 그릇된 욕망을 품은 한 인간, 연약하고 어리석고 미련한 인간 말이에요.” 그렇다고 러빗이 마냥 심각한 캐릭터는 아니다. 오히려 쉴 새 없이 수다를 늘어놓으며 관객을 웃긴다. 뮤지컬 거장 스티븐 손드하임은 박자를 잘게 쪼갠 음악으로 러빗의 매력을 극대화한다.
모두 경력직인 세 러빗(전미도·김지현·린아)와 달리 토드 역의 강필석·신성록·이규형은 ‘스위니토드’ 초심자다. 전미도에게 세 토드의 매력을 비교해달라고 청하니 그는 “어렵다”며 웃었다. “필석 오빠의 토드는 여유와 무게감이 있어요. 눈가가 촉촉해 연민도 생기죠. 신성록 배우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매력이 있어요. 러빗으로서 대할 때 더 조심스럽고 애가 타죠. 규형 배우는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났어요. 감각적으로 연기하더라고요. 유일하게 저보다 어린 토드라 보호해주고 싶어요.(웃음)”
2006년 데뷔한 전미도는 뮤지컬, 연극, 드라마를 오가며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왔다. 사랑에 눈뜬 휴머노이드 로봇(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비극적 사랑에 빠진 귀족 가문 소녀(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JTBC ‘서른, 아홉’) 등을 연기하며 “어울리는 역할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보기 좋게 박살 냈다. 전미도는 “10대, 고등학생 등 어려 보이는 역할만 들어오던 때가 있었다. 치기 어린 마음에 색다른 역할에 더 도전했다”며 “어느 순간 단점이 장점으로 변했다. 내게서 기대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을 때 (관객이) 신선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고 돌아봤다.
그래서일까. 전미도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니 나름대로 괜찮은 사람 같다”고 했다. 지난 3월 ‘서른, 아홉’ 종영 이후 활동을 쉬며 가진 생각이란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요.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구나’라고 느끼면서 캐릭터에 더욱 가깝게 다가가기도 하고요. 하지만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저는 결국 강한 사람, 선(善)을 택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더군요. 제가 좀 더 좋아졌어요.” 연기는 여전히 어렵지만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도 했다. “‘스위니토드’를 하면서 내년을 맞을 텐데, 나이를 숫자로만 먹지 않고 싶어요. 숫자가 는 만큼 더 좋은 연기로 팬들을 찾아뵙고 싶습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