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고도 참았다…인권 실종된 K팝의 비극

맞고도 참았다…인권 실종된 K팝의 비극

기사승인 2022-11-25 06:01:02
그룹 오메가엑스.   사진=이은호 기자

# 11인조 보이그룹 오메가엑스는 지난 16일 소속사 스파이어엔터테인먼트를 상대로 전속계약 효력 정지 처분을 신청했다. 소속사 대표인 강모씨가 멤버들에게 폭언·폭행·성추행 등을 저질렀다는 이유에서다. 멤버들은 강씨를 폭행·협박·업무상 위력에 의한 강제추행·공갈 미수로 고소하고 손해배상청구 소송도 낼 계획이다.

# 가수 이승기는 지난 17일 소속사 후크엔터테인먼트에 미지급한 음원 수익을 정산해달라고 요청했다가 폭언을 들었다고 한다. 이승기 법률대리인은 24일 낸 입장문에서 “소속사 대표 등으로부터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의 모욕적이고 위협적인 언사를 전해 들었다”며 “소속사와 신뢰가 이어질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세계적인 현상으로 빛나는 K팝에 인권 침해라는 그림자가 드러났다. 오메가엑스 멤버들이 소속사로부터 신체·정신적 학대를 당했다고 폭로한 데 이어, 이승기가 소속사 대표에게 가스라이팅(정신 지배) 당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다. 연예 기획사에서 벌어지는 폭력 갑질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문제는 피해를 봐도 사법 조치를 취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소속사와 계약 해지는 물론, 은퇴까지 결심해야 해서다.

“참지 않으면 마지막 기회가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소속사 대표를 고소한 오메가엑스 멤버들은 16일 연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들 모두 앞서 각기 다른 그룹에서 활동했다가 오메가엑스로 재데뷔한 ‘경력직 신인’이다. 리더 재한은 “두 번째로 도전하는 꿈이라 불미스러운 일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우릴 응원해주는 팬들을 위해 부당한 일도 참아야 한다고만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오메가엑스. 스파이어엔터테인먼트

학대는 1년여간 이어졌다. 멤버들과 법률대리인에 따르면 강씨는 오메가엑스에게 폭언과 폭행을 가하고, 성희롱과 성추행도 저질렀다. 기자회견 내용을 종합하면 강씨는 미니 2집을 준비하던 지난해 11월부터 멤버들에게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다음 음반을 내주지 않겠다’ ‘활동하고 싶으면 내게 기어라’고 엄포를 놨다고 한다. 술자리에 멤버들을 불러 자기 대신 술을 마시게 하거나 신체 접촉을 하기도 했다고 멤버들은 주장했다. 강씨가 지난달 미국 공연을 마친 멤버들에게 윽박지르는 장면이 온라인에 공개되며 학대 정황이 세간에 알려졌다.

이전에도 아이돌 가수가 소속사 관계자에게 폭행당한 사건이 있었다. 밴드 더 이스트라이트 멤버였던 이석철·이승현 형제는 2019년 소속사 프로듀서 문모씨에게 상습 폭행을 당했다며 문씨를 상습아동학대 혐의로 고소했다. 문씨는 징역 1년4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그룹 TRCNG 멤버 우엽·태선도 소속사 직원에게 폭행·폭언을 당했다며 안무팀장 등 3명을 고소했다. 이 중 2명은 벌금형 처분을 받았다. 두 사건을 담당한 법무법인 남강 정지석 변호사는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폭행 사건은 증거가 남아 유죄 판결을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피해자를) 억압하는 분위기를 조성한 혐의는 입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20년 12월 공개한 ‘대중문화산업 종사 아동·청소년 인권상황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대중문화산업 종사 아동·청소년에게 설문한 결과, 최대 한 달에 1~2회 정도 방송 제작진이나 소속사 관계자로부터 신체 체벌을 당했다는 응답자가 일부 있었다. 소속사 관계자 혹은 선배·동료 연예인에게 일주일에 1~2회, 많게는 주 3회 이상 지나친 꾸짖음과 욕설 피해를 경험했다는 응답자도 있었다. 보고서는 “제작진이나 소속사 관계자로부터의 성적 피해를 본 응답자도 소수 있었다”며 “이들은 캐스팅에 대한 불이익이나 문제 제기에 대한 부담감을 이유로 피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밴드 더 이스트라이트 멤버 이석철(왼쪽), 이승현.   사진=박효상 기자

업계 관계자들은 “피해 사실을 밝히지 못하는 연습생이나 연예인은 더 많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익명을 요청한 가요계 관계자는 “소속사와 분쟁을 겪은 가수와 연습생은 다른 기획사에서도 영입하기를 꺼린다”고 했다. 업계가 좁아 소문이 빠르게 번지는 데다, 혹여 자신들도 송사에 휘말릴까 걱정해서다. 정 변호사도 “피해자들이 조기 은퇴까지 결심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피해자들에겐 피해 사실을 알리고 도움 받을 창구가 절실하다. 한국연예매니지먼트가 상벌윤리위원회를 운영하고 있으나 대부분 전속계약 분쟁을 조정하는 정도에 그친다. 연매협 관계자는 “회원사 대부분 배우 기획사”라며 “(연습생이나 연예인이) 폭행이나 폭언을 당했다며 도움을 청해온 사례는 없었다”고 말했다. 가요 기획사 및 음반 제작사 등으로 구성된 한국연예제작자협회도 인권 침해를 겪은 가수나 연습생을 구제할 기구는 따로 운영하지 않고 있다.

그나마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콘텐츠공정상생센터와 콘텐츠성평등센터를 두고 불공정 행위와 성희롱·성폭행으로 인한 피해자를 각각 지원하고 있다. 콘진원 관계자는 “콘텐츠공정상생센터나 콘텐츠성평등센터에 피해 사실을 신고하면 내부 심의를 거쳐 권고안을 만들어준다. 심리상담과 법률지원도 받을 수 있다”면서 “연습생 대부분이 미성년자라 피해를 봐도 범죄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렵다. 이런 경우 사법 절차를 밟기 전 관련 센터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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