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도 나이도 들고 했으니 화내지 않고 점잖게 지내고 싶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면 화나는 일이 많고 그 것을 속으로 삭일 수 없으니 화를 내는 것이다. 주변 상황들이 눈과 귀에 순(順)하거나 화나는 일이 있어도 내 인격이 받쳐줘 속으로 삭일 수 있다면 굳이 점잖지 못하게 왜 화를 내겠나. 더구나 주변 식구들이 그렇게 싫다고 하는데.
지난 목요일에 K사 직원이 다녀갔다. 눈 때문에 길이 막혀 한 참을 걸어와야 하는 데도 온 것을 보면 뭔가 급한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무슨 일인지 짐작 가는 바가 있기는 했다.
지난 주 초에 K사 본사의 민원담당 부서라는 곳에서 나에게 전화가 한통 왔다. 인터넷을 설치해 달라는 신청이 몇 차례 접수가 된 것으로 확인되는데 최종적으로 어떻게 처리가 됐느냐고 묻는 전화였다. 처음에는 “자기들이 처리한 일을 왜 나한테 묻지?” 의아했지만 곧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다.
“K사에 1년여에 걸쳐 인터넷 설치를 포함한 총 10여 차례의 민원을 신청했지만 제대로 처리된 사안이 하나도 없다. 또한 개개 민원 처리결과를 통보 받은 적도 없다”는 내용이다. K사 직원이 급하게 우리 집을 방문했다면 아마 그 전화 때문 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상했던 대로 K사 직원은 인터넷 설치를 위한 견적서 2부를 가지고 왔다. 한 부는 ‘초고속 인터넷 보편적 서비스’를 적용한 것이고 한 부는 ‘일반 견적서’라고 했다. 전자에는 인터넷 회선 설치비로 1021만3000원이 적혀있었고 후자에는 1220만6000원, 차액은 199만3000원이었다.
예전에 정부(과학기술정통부)가 초고속 인터넷을 모든 국민에게 제공한다고 발표했던 것이 생각나 자료를 찾아봤다.
“정부는 2020년 1월부터 초고속 인터넷이 보편적 서비스로 지정됨에 따라 모든 지역에서 국민이 요청하면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이 제도 개선으로 정부는 농어촌, 산간지역 등 네트워크 사각지대의 이용자는 다양한 일상생활에서 초고속인터넷을 이용할 것으로 기대한다.”(과기정통부 보도자료 2020년 1월3일)
정부가 초고속 인터넷을 보편적 서비스로 지정했다는 것은 말이 애매해서 그렇지 인터넷 사용권을 국민의 기본권으로 인정한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정부는 국민 모두가 합리적인 비용으로 초고속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것이고.
그런데 무슨 깊은 산 속에 있는 집도 아니고 차가 다니는 큰 길까지 대략 700m(직선거리로는 400~500m) 정도 밖에 안 되는 곳까지 인터넷을 끌어오는 데 1000만 원 이상이 소요된다면, 그러고도 국민의 기본권 운운할 수 있는 것인가. 과연 1000만원이 인터넷 사용을 위한 합리적인 비용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금액인가?
아마도 이 사업을 추진했던 과기정통부 관료는 지금쯤이면 이 사업에 대해서는 까마득하게 잊고 또 다른 생색낼 만한 사업을 찾고 있느라 분주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예산 등 후속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은 아닐까.
또한 K사도 그렇다. 견적서 내용을 살펴보니 통신회선을 끌어오는데 소요되는 비용 중 K사가 부담하는 부분은 하나도 없다. 700m의 통신회선을 설치하는 비용 전체를 소비자에게 부담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타당한 일인가. 내가 비용을 부담하여 통신회선을 설치하면 그 부분을 내 소유로 해주기라도 하나? 자기들이 통신 서비스를 팔기위해 설치하는 인프라 구축비용을 왜 나보고 다 내라고 하나.
시간이 흘러 내가 사는 집 주변으로 마을이 형성됐다고 생각해보자. 주민들이 인터넷을 사용할 것이고 K사로서는 수익이 발생할 것이다. 내가 비용을 들여 설치한 통신회선을 사용할 것이고. 그 때가 되면 K사 수익 일부를 나에게 나눠주기라도 할 것인가? 그에 관해서는 어떠한 약속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비용 전체를 나에게 부담시키는 것은 부당하지 않은가.
내가 화를 내는 것은 이런 일들을 겪을 때이다. 농촌에 살다보면 의외로 이런 부당한 경우를 많이 겪는다. 농촌에 사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대응할 능력이 상대적으로 낮다보니 사회가 함부로 대한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렇다고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생업을 포기하고 발 벗고 나서서 부당한 제도나 관행과 맞서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니 속으로 열불이 나서 화를 내는 것인데 내 말은 안 듣고 화만 내지 말라고 한다. 오래전에 읽었던 정신과 의사 정혜신 선생이 쓴 책(‘당신이 옳다’)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엄마는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지. 선생님도 혼내서 얼마나 속상했는데 엄마는 나를 위로해 줘야지. 그 애가 먼저 나에게 시비를 걸었고 내가 얼마나 참다가 때렸는데. 엄마도 나보고 잘못했다고 하면 안 되지.”
◇ 임송
중앙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펜(Upenn)대학 대학원에서 사회정책학을 공부했다. 1989~2008년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등에서 공직 생활을 했다. 부이사관으로 퇴직 후 일용직 목수를 거쳐 2010년 지리산(전북 남원시 아영면 갈계리)으로 귀농해 농사를 짓다가 최근 동네에 농산물 가공회사 '웰빙팜'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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