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길 끊기는데 강제징집 공포까지' 동해항은 지금[르포]

'바닷길 끊기는데 강제징집 공포까지' 동해항은 지금[르포]

기사승인 2023-01-06 18:22:49
6일 오후 러시아인들이 동해항 국제여객터미널 입국장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다. 사진 = 손대선 기자  


강원 동해시에 자리 잡은 동해항은 한국-러시아 직교역항이다. 두원상선이 운용하는 배수량 1만1500톤짜리 국제카페리 이스턴드림호가 동해항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항을 오가며 사람과 화물을 싣고 내린다.  

6일 낮 12시께 찾아간 동해항 국제여객터미널은 막 입항한 이스턴드림호의 승객들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영상 9도의 따뜻한 날씨여서 가벼운 옷차림을 한 사람이 눈에 많이 띄었다. 2시간여에 걸친 지루한 입국수속이 마무리되면서 입국장 문이 열렸다. 한국인들이 먼저 나와 지인들과 인사를 나왔다. 이어 러시아인과 중앙아시아인들이 줄지어 나왔다. 키릴문자가 적힌 안내판을 든 택시기사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동해항이 최근 주목받는 이유는 해를 넘겨도 끝날지 모르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이다. 동해-블라디보스토크 항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국제사회 제재로 하늘길이 막히면서 한국과 러시아를 잇는 최단거리이자 유일한 바닷길이 됐다. 요즘에는 주 1회, 최대 400여명의 내⋅외국인이 이스턴드림호를 탄다. 승객들은 비행기 푯값보다 3배 이상 비싼 140여만 원을 내고 24시간 꼬박 걸려 바닷길을 건넌다.  

동해지방해양수산청에 따르면 이날 이스턴드림호를 타고 입국하는 사람은 416명. 이중 한국인이 55명이다. 통상 취업이나 관광차 한국을 찾는 러시아인이 대부분인데 이날만큼은 한국인이 유독 많다고 한다. 

6일 오후 가족단위 러시아인들이 동해항 국제여객터미널 입국장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다. 사진 = 손대선 기자  


건조된 지 30년이 넘어 노후화한 이스턴드림호가 곧 수리에 들어가 당장 뱃길이 끊길 수 있다는 풍문이 러시아내 한인사회에서 돌고 있기 때문이다. 두원상선 측에 문의해 보니 실제로 이스턴드림호는 이달 26일 블라디보스토크항을 출발해 다음날 동해항에 입항한 후 곧바로 기약 없는 수리에 들어간다. 이 회사 관계자는 "수리는 2월14일까지 이뤄지는데 그 이후에도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라고 말했다.  

귀국길이 막힐 수 있다는 두려움도 두려움이지만 강제징집 공포가 휩쓸고 있는 현지 사정도 한국인들의 이른 귀국을 재촉하는 모양이었다.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수세에 몰린 러시아 정부는 지난해 9월 30만 명 규모의 부분 동원령을 내린 데 이어 추가 동원령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우, 모스크바 등 일부 대도시권에서 진행되는 것으로 전해진 강제징집이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다. 러시아 영토 최동단으로 전쟁과 무관할 것 같은 블라디보스토크도 예외는 아니었다.   

입국장을 빠져나온 70대 한국 남성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병력이 모자란 러시아 정부가 강제징집에 나서면서 젊은이들이 속절없이 끌려가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다"며 "한인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고려인들도 강제징집의 타깃"이라고 말했다.  

6일 낮 개방 전의 동해항 국제여객터미널 전경. 사진 = 손대선 기자 


2016년부터 러시아 현지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는 그는 "전쟁 때문에 비상상황이어서 이스턴드림호가 다닌 것인데 수리를 해서 언제 다시 띄운다는 얘기가 없다"며 "(현지 한국인들이)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드나드는 것은 사업상이지만 러시아 분들이 오는 건 명목상 취업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강제징집을 피해)탈출하는 것"이라며 "지금은 동해항이 유일한 탈출구"라고 말했다.

또 다른 한국인은 "강제징집 당해서 가면 죽는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전사하면 8000만원을 보상금 준다고 하는데, 죽으면 화장하고 군 당국에서 탈영했다고 발뺌을 한다는 얘기가 있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면서 "아는 분이 (군사)훈련장 면회를 갔는데 군 당국에서 해주는 것이 없어서 군복도 자기가 사서 입고가야 하는 형편이라고 한다"며 "러시아 부모들이 많이 마음을 졸이고 있다. '우리 손자가 갔는데 소식이 없다'고 한다. 전쟁 통에 이 나라(러시아)가 얼마나 가난해졌으면 군복까지 사 입어야 하느냐"고 혀를 찼다.  

그는 "나를 배까지 데려다 준 40대 고려인이 '나 같은 사람도 붙들려가지 않을까"라고 불안해 한다"고 전했다.

6일 오후 동해항에 입항하는 이스턴드림호. 승객들이 하선하고 있다. 사진 = 손대선 기자 


이날 입국한 러시아인들은 '전쟁'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대다수가 가족단위 러시아인들이었다. 

"관광차 한국을 찾았다"는 샤롱(25)씨는 이날 입국한 러시아인 중 가장 젊은 축이었다. 그는 김치, 불고기, 서울 등에 관심을 보였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입장을 묻자 "아는 것이 없다"며 급히 자리를 피했다. 

한국인 남편을 둔 율리아(33)씨가 이날 취재에 응한 유일한 러시아인이었다. 부모가 보내준 택배를 기다리던 그는 이번 전쟁에 대해 "우크라이나의 잘못"이라며 "남편도 그렇고 주변 사람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율리아씨는 "8년째 한국생활을 하고 있다"며 "일주일 전에도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같은 슬라브 민족"이라며 "전쟁은 생각하기도 싫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낮 동안 살펴본 동해항은 여느 번잡한 항과 다름없어 보였다. 하지만 입국하는 내외국인들의 언행에서 묘한 긴장감을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국으로부터 7500km나 떨어진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여진. '전쟁의 세계화'는 기이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동해 = 손대선 기자 sds1105@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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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ds1105@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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