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분단, 베트남 전쟁…. 4일 85세를 일기로 영면에 든 가수 현미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몸소 겪으며 대중을 위로한 치유의 음악가였다.
현미는 데뷔 과정부터 드라마틱했다. 1957년 미8군 부대에서 칼춤 무용수로 활동하다가 펑크 난 가수를 대신해 무대에 오르면서 가수 인생을 시작했다. 현미는 당시 가수 김정애, 현주와 함께 3인조 보컬 그룹 현시스터즈를 결성해 활동하며 미8군 쇼의 간판스타로 떠올랐다.
이런 현미를 눈여겨본 이가 훗날 부부의 연을 맺은 작곡가 故 이봉조. 두 사람은 1960년대 히트곡 제조 커플로 통했다. 1962년 현미 첫 독집 음반을 필두로 ‘밤안개’ ‘몽땅 내 사랑’ ‘떠날 때는 말 없이’ ‘별’ 등의 히트곡을 냈다. 이 중 ‘별’은 현미에게 1971년 제4회 그리스국제가요제 ‘송 오브 올림피아드’ 트로피를 안겨다 줬다.
현미는 당대 여가수로는 흔치 않게 중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특징이었다. 성량도 우렁차서 ‘밤안개’를 녹음할 땐 마이크에서 두세 걸음 떨어져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김학선 음악평론가는 올해 초 아리랑TV ‘더 K레전드: 가수 현미의 쉬즈 스틸 싱잉’에서 “풍부한 성량으로 노래를 하는 가수를 디바라고 말한다. 현미는 한국 대중 음악계에서 가장 최초로 그런 역할에 부합하는 아티스트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한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가수이기도 했다. 1·4 후퇴 때 평양 조부모님 댁에 두 동생을 두고 급히 피난했던 그는 1964년 발표한 노래 ‘보고 싶은 얼굴’에 이산가족의 아픔을 풀어놨다. 그는 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중국에서 두 동생을 만났고, 2020년에는 이산가족 고향체험 VR(가상현실) 콘텐츠 제작에도 참여했다. 베트남 전쟁 땐 파병된 한국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열려고 세 번이나 전쟁터를 다녀오기도 했다.
현미는 2007년 데뷔 50주년을 기념한 기자회견에서 “목소리가 안 나오면 모를까 은퇴는 없다. 나이가 80세든 90세든 이가 확 빠질 때까지 노래할 것”이라고 말했을 만큼 음악에 열정을 불태웠다. 실제 산수(80세)를 맞은 2017년 신곡 ‘내 걱정은 하지 마’를 발표했다. 지난해에도 TV조선 예능 프로그램 ‘화요일은 밤이 좋아’에 출연해 가수 김태연과 함께 패티김의 노래 ‘빛과 그림자’를 열창했다.
후배 가수들은 현미를 “어머니 같은 선배”로 기억한다. 대한가수협회장이자 히트곡 ‘찰랑찰랑’ ‘친구야’ 등을 낸 가수 이자연은 이날 쿠키뉴스와 통화에서 “‘(나)훈아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다’며 딸처럼 저를 예뻐해 주셨다. 권위적인 모습 없이 언니처럼, 친구처럼 편안하게 후배들을 대하셨다”며 “혼을 다 바쳐서 정열적으로 노래하시는 모습이 후배 가수들에게 늘 귀감이 됐다”라고 말했다.
현미는 이봉조와 사이에서 아들 둘(이영곤·영준)을 뒀다. 장남 이영곤은 과거 가수로 활동하며 현미의 50주년 공연 무대에도 섰다. 히트곡 ‘사랑은 유리 같은 것’을 발표한 가수 겸 배우 원준희를 둘째 며느리로 뒀고, 가수 노사연과 배우 한상진의 이모이기도 하다. 빈소는 서울 중앙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