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장을 하고서라도 정치물에 출연하고 싶었다”는 배우 김희애의 소원이 이뤄졌다. 지난 14일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퀸메이커’를 통해서다. 11부작으로 꾸려진 이 작품은 선거 전략가부터 서울시장 후보, 악덕 대기업 총수와 후계를 노리는 자식들, 겉과 속이 다른 중견 정치인까지 등 주요 인물 대부분이 아무렇지 않게 여성으로 채워졌다. ‘퀸메이커’가 여성 서사이기에 이룰 수 있던 성취들을 쿠키뉴스가 꼽아봤다.
여성끼리 사랑할 수 있다
우정이라 말하자니 설레고 연대라고 부르기엔 농밀하다. 황도희(김희애)와 오경숙(문소리)의 사이가 그렇다. 서울시장 예비후보 TV 토론 자리. 은성그룹 해결사였던 도희의 과거를 서민정(진경)이 언급하자 경숙은 이렇게 맞선다. “과거 행보가 다르다는 이유로 저한테 인생을 바친 여자를 버려야 한다, 그런 이야기인가요?” 경숙이 도희의 안전을 걱정해 은성그룹 비리 폭로를 망설일 땐, 도희가 이런 말을 한다. “네가 이겨서 힘을 갖고 그 힘으로 날 지켜주면 되는 거 아니야? 설마, 너한테 인생을 건 여자를 버릴 건 아니잖아.” 두 사람의 관계는 ‘워맨스’(우먼 로맨스)라는 신조어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성적 긴장감을 동반한다. 황도희와 손영심(서이숙)의 케미스트리도 만만치 않다. 영심의 등에 칼을 꽂으려는 도희와 그런 도희를 두고 볼 수 없는 영심은, 그러나 눈물이 괸 슬픈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급기야 영심, 도희의 목도리를 만지작대며 “날이 춥다. 몸조심해라. 넌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탔잖니”라고까지 말한다. 적대 관계라기에는 애틋한 이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혹은 ‘여돕여’(여자를 돕는 건 여자) 구도 바깥에서 존재하는 여성들의 관계는 이렇게나 다채롭고 복잡하다.
페미니즘을 거론할 수 있다
경숙은 페미니스트다. 그를 후원하는 시민단체는 여성연대 ‘숨’이고, 그가 대변하는 목소리는 부당하게 해고당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신음이다. ‘퀸메이커’는 숨의 동지이나 민정의 선거캠프에 회유당해 거짓 기자회견을 했던 화수(김선영)의 입을 통해 페미니스트로서 경숙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어떤 인물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기 위해 반드시 페미니스트 선언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경숙 이전에도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여성 캐릭터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한국 드라마에서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직접 거론된 적은 드물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찍힌 ‘페미 묻었다’는 낙인이 프로그램을 향한 공격으로 이어져서다. 직장 내 성차별 사건으로 에피소드를 꾸린 ENA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대표적이다. 온라인에서 시작한 비방이 ‘논란’이라는 단어와 함께 기사화되는 순간, 드라마에 페미니즘 가치를 담는 것이 왜 문제냐는 논의는 시작조차 되지 못한 채 배우와 제작진은 논란을 해명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여자들 인생 여자들이 좀 지켜주면서 좋은 세상 한번 만들어보자 약속했었지”라는 “페미니스트” 경숙의 말은 그래서 귀하다. 무의미한 공격에도 창작자의 입을 트여주기 때문이다.
마음껏 땀 흘리고 소리친다
경숙은 땀이 많다. 본인 설명을 빌리자면, 체질적으로 그렇단다. 얼굴이나 손에 땀이 삐질 나는 정도가 아니다. 겨드랑이가 흥건히 젖을 정도로 땀을 줄줄 흘린다. 하지만 경숙에게 땀은 숨겨야 할 결점이 아니다. 누군가가 땀으로 얼룩진 옷을 지적해도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응, 나 원래 땀 많아.” 온라인에서 경숙의 ‘겨땀’을 희화화하는 동영상을 올려도 도통 기죽는 법이 없다. 그에겐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일 뿐이어서다. 땀 흘릴 때조차 예쁜 여성은 ‘퀸메이커’에 없다. 극 중 여성들에겐 생활감이 가득하다. 일상에서 보던 자연스러움이 뿜어져 나온다. 민정은 상황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자 정책국장 중석(김태훈)에게 일을 못 한다며 온갖 욕설을 내뱉는다. ‘퀸메이커’가 그리는 세계에서 여성은 솔직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난처할 땐 머리를 쥐어뜯고, 허를 찔리자 건조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운다. 눈물이 날 땐 얼굴을 마구 구겨가며 엉엉 운다. 대립할 땐 마구 삿대질하며 열을 내뿜는다. 이들에게 예뻐 보여야 할 의무는 없다. 사회가 관습적으로 규정하던 ‘여성다움’이란 굴레는, 적어도 이 세계엔 존재하지 않는다. 강박을 벗어던진 무대에서 여성들은 마음껏 날뛴다. 그래도 되냐고? 물론이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사람답게 굴 뿐이니까.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인권 운동가, 변호사, 정치인, 대기업 회장, 백화점 사장, 실장, 팀장, 선거 캠프 직원… ‘퀸메이커’에 등장하는 이 직업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다 여성이라는 점이다. ‘퀸메이커’는 여성을 누군가의 엄마로만 배치하지 않는다. 엄마이기 이전에 직업인으로서 본능이 번뜩이는 중년 여성이 곳곳에 포진했다. 약자를 위해 투쟁을 거듭한 노동 인권 변호사 경숙, 냉혹한 정치판에서 세 번의 선거를 겪은 3선 국회의원 민정이 대표적이다. 부를 거머쥔 여성 권력자도 여럿 나온다. 은성그룹을 이끄는 회장 영심과 그의 자녀들, 영심과 교류하는 회장들 역시 여성이다. 영심이 데릴사위 재민(류수영)에게 “내 딸은 너의 평생 대운”이라고 할 정도다. 도희는 커리어에 평생을 바치며 은성그룹 전략기획실장으로까지 올라섰다. 주요 인물뿐만이 아니다. ‘퀸메이커’는 작은 역할에도 여성 캐릭터를 알차게 심었다. 대표적인 게 선거캠프다. 경숙의 선거캠프는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가 여성으로 꾸려져 있다. 화수를 비롯해 경숙과 고락을 함께한 든든한 언니들도 있다. 이들 배우가 그동안 작품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생각하면 ‘퀸메이커’에서 보여준 활약은 더욱 고무적으로 와닿는다. 여성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계는 그래서 더 귀하고 달갑다.
이은호 김예슬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