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류수정은 환상 속의 소녀였다. 2014년 그룹 러블리즈 멤버로 데뷔한 그는 아름답게 가꿔진 환상 안에서 아련한 첫사랑을 노래하곤 했다. 그 후 9년. 소녀는 현실로 걸어 나왔다.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해?/ 밤새 기도하면 이뤄진다는/ 동화 속 스윗 라이(Sweet lie·달콤한 거짓말)” 그는 지난 20일 발매한 새 미니음반 첫곡 ‘논-판타지’(Non-Fantasy)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몽환적인 목소리가 류수정의 세계로 듣는 이를 이끄는 주문 같다.
컴백을 앞두고 서울 청담동 한 카페에서 만난 류수정은 작업 비화를 이렇게 털어놨다. “예전엔 꿈꾸면 무조건 이뤄진다고 희망에 차 있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꿈꾼다고 혹은 노력한다고 모든 일이 이뤄지진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쓴 곡이 ‘논-판타지’예요.” 그렇다고 그가 마냥 비관에 빠진 것은 아니다. 류수정은 타이틀곡 ‘그래비 걸’(Grabby Girl)에서 “기브 업? 아이 캔트”(Give up? I can’t·포기? 난 못 해)라며 야망을 불태운다. 첫사랑에 설레 하고 짝사랑에 아파하던 소녀는 그렇게 어른이 됐다.
류수정은 애초 미니음반을 계획하고 음악 작업을 시작했다가 프로듀서 죠 등과 죽이 잘 맞아 정규음반으로 규모를 키웠다. 죠가 비트를 만들면 류수정이 즉석에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음악을 완성했다. 가사엔 류수정이 20대 후반에 접어들며 가진 고민을 담았다. 그는 “곡을 쓰기 전엔 어디까지 솔직해야 할까 걱정도 했다. 그런데 막상 쓸 때는 (속내를 털어놓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고 했다.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잖아요. 들으시는 분들도 제 얘기에 공감하며 치유 받으시면 좋겠어요. 특히 제 또래 친구들에게 음반을 추천하고 싶어요. 환상 속에 살다가 현실에서 꿈꾸기 시작한 사람들, 그러면서 아픔을 겪는 분들 말이에요.”
열여덟 살에 데뷔한 류수정은 한때 ‘청순돌’ 대표주자로 불렸다. 그가 속했던 러블리즈는 가수 겸 프로듀서 윤상의 지휘 아래 ‘아츄’(Ah-Choo), ‘데스티니’(Destiny) 등을 히트시켰지만, 한동안 별다른 활동을 펼치지 못하다가 2021년 소속사와 계약 만료로 뿔뿔이 흩어졌다. 류수정은 러블리즈로 활동한 7년 동안 “단단해지는 법을 배웠다”고 돌아봤다. 워낙 눈물이 많아 어려서부터 울보라고 불렸다는 그는 “좀 더 건강한 생각을 하며 긍정적인 미래를 볼 수 있게 됐다”며 “숫자로 나타나는 성과를 기대하지 않을수록 오히려 사소한 행복이 커진다”고 말했다.
그 덕분일까. 요즘 류수정은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하나씩 늘려가고 있다. “맑은 날 엄마와 하는 산책, 우연히 올려다본 하늘…. 이런 것들이 눈물 나게 행복하더라고요.” 이렇게 말하며 웃는 그에게선 평온함이 엿보였다. 류수정은 “그룹 활동 때부터 일 욕심이 많았다. 계획이 틀어지면 스트레스도 컸다. 어쩌면 그런 성격 때문에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붙들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지난해 그가 차린 독립 레이블 이름은 하우스 오브 드림스(House of Dreams), 우리 말로 꿈의 집이다. 류수정은 그 안에서 새로운 꿈을 꾼다. “나를 위해 노래”(노래 ‘핑크 문’ 가사)하겠다는 꿈을.
“음반 성적이 높으면 좋죠. 하지만 지금은 결과를 목표로 두지 않아요. 행복하게 음반을 만들자는 마음뿐이었거든요. 류수정이라는 가수가 뭘 하고 싶은지 점점 더 알게 됐어요. 자연스러운 감정과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꺼내놓고 싶습니다. 하지만 혹시 몰라요. 어마어마하게 꾸민 음악으로 즐거움을 드릴지도. 장르에 갇히지 않고, ‘류수정 음악’이라는 한 뭉텅이를 만들고 싶어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