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경험이 몇이나 될까. 죽을 고비 정도는 넘겨봐야 새 인생을 살 결심이 설지 모른다. JTBC 토일드라마 ‘닥터 차정숙’은 이런 가정에서 출발하는 드라마다. 주부 차정숙(엄정화)은 생사 갈림길에 서고 나서야 비로소 제 인생을 되찾아야겠다는 용기를 품는다.
차정숙은 전형적인 현모양처다. 살림에 전념하고 남편 뒷바라지, 자식 교육 잘 시키는 게 미덕이라 여긴다. 그에게도 꿈은 당연히 있었다. 우수한 의대생이던 그는 이른 나이에 엄마가 됐다. 일련의 사건을 거쳐 가정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그는 전공의 과정을 포기하고 전업주부로 살았다. 그는 기꺼이 인생을 가족에게 쏟아붓는다. 까다로운 시어머니 비위 맞추랴,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남편 챙기랴, 아들·딸 돌보랴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좋은 기술 놔두고 집에서 왜 살림만 하냐”는 의사 친구 핀잔에도 “네가 자신만을 위해 살 때, 나는 애 둘 낳아 키워 사람 만들어놓지 않았냐”며 자랑스러워한다. 그에겐 가족과 가정의 평화가 곧 최고 성취이기 때문이다.
그런 차정숙에게도 일생일대 사건이 일어난다. 간 이식을 받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단다. 하루아침에 시한부 선고가 떨어진 그는 심란하다. 남편이 이식 적합자 판정을 받았지만 시어머니는 쌍심지 켜고 반대한다. 울며 겨자 먹기로 간 이식에 나섰던 남편은 수술 직전 마음을 바꾼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급한 상황, 차정숙을 살린 건 가족이 아닌 일면식도 없던 뇌사자였다. 일평생 가정에 헌신하다 헌신짝 신세를 경험한 그는 결심한다. 이대로 살 순 없다고. 그는 수술 후 눈을 뜨자마자 남편에게 욕부터 내뱉는다.
‘닥터 차정숙’은 평범한 주부 차정숙에게 극적인 상황을 덧입혀 공감과 대리만족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 차정숙의 일상엔 이입할 여지가 많다. 차정숙은 누리는 것 없이 의무만 가득하다. 내조, 살림, 절약, 입시 서포트, 시어머니 부양… 그는 죽다 살아난 뒤 이 모든 의무에 반기를 든다. 남편 카드를 마음껏 긁는 걸 시작으로 시어머니에게 속 시원히 할 말 다 하고 아침상 차리기도 그만둔다. 차정숙의 안쓰러운 신세에 이입하던 시청자로선 확 달라진 그의 모습이 그저 반가울 뿐이다. 속 시원하다는 시청평이 잇따르는 건 당연지사다.
차정숙은 각성한 주부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포기했던 꿈, 의사가 되기로 한다. 남편이자 구산대병원 교수 서인호(김병철)는 코웃음부터 친다. “늙고 병든 전공의 누가 반갑다고 해? 민폐 끼칠 생각 말고 포기해.” 남편의 무시에도 그는 만점에 가까운 점수로 전공의 시험을 통과한다. 어려움을 딛고 시작한 레지던트 생활은 혹독하기만 하다. 나이 많다고 실수까지 무능으로 취급받는 현실에서 차정숙은 악착같이 노력한다. 그의 곁엔 멋진 조력자가 함께한다. 과거 그의 간 수술을 집도한 동료 의사 로이킴(민우혁), 아들이자 동료 레지던트 서정민(송지호) 응원에 힘입어 그는 차근차근 성장한다.
‘닥터 차정숙’은 우리네 어머니를 꼭 빼닮은 차정숙이 변화하는 과정을 비추며 자연스레 몰입감을 키운다. 굴레를 벗어던진 차정숙은 훨훨 난다. “병원이 의사 타이틀 갖고 싶은 사모님 자아실현 시켜주는 덴 줄 아냐”며 비아냥대는 남편에게 “아프고 나니까 내가 얼마나 좋은 의사가 되고 싶어 했는지 생각났다”고 당당히 맞선다. 사춘기 딸의 투정에 “엄마도 한 번쯤은 나 자신으로 살아보고 싶다”며 솔직한 마음을 고백한다. 걱정하는 아들에게 “엄마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며 미소 짓는다.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가 아닌, 레지던트 1년 차 차정숙 선생으로 인생 2막을 연다. 편견과 통념에 보란 듯 엇나가는 차정숙의 달라진 모습은 짜릿한 쾌감을 안긴다. 드라마는 차정숙이 능력 있는 사회인으로 발돋움하는 모습과 더불어 남편 서인호의 불륜, 묘한 기류를 풍기는 조력자 로이킴 등 여러 이야깃거리를 담으며 말초적인 흥미를 더한다. 의학용어를 설명하는 대신 인물 사이 관계와 서사 등 통속극 본질에 집중하며 복잡함을 덜어낸다.
단순히 오락적인 재미만 추구하는 드라마는 아니다. ‘닥터 차정숙’은 오랜 기간 미디어가 소구한 중년 여성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전면에서 깨부순다. 병원 동료들이 “아줌마 레지던트는 민폐”라며 뒤에서 헐뜯을 때, 차정숙은 진심을 다해 환자를 돌봐 혁혁한 성과를 낸다. 차정숙은 의존적으로 묘사되던 주부 캐릭터의 전형성을 따르지 않는다. 기회를 잡자 맘껏 뛰노는 차정숙은 그래서 더 멋지다. 완전히 달라진 차정숙에 이입해 울고 웃다 보면 극이 지향하는 대리만족 판타지에 더욱더 빠져든다. 혹시 아는가. 이 판타지를 현실로 만들 제2의 차정숙이 나올지도! 유쾌한 상상은 덤이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