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일, KBS 정오 뉴스에는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안내견과 함께 걸어오는 짧은 영상에 이어 등장한 앵커. 손가락을 능숙하게 움직이며 차분한 어조로 뉴스를 전한다. 뉴스를 진행하며 그가 의지하는 건 손바닥보다 약간 큰 점자 정보 단말기. 그의 정체는 지난 3월 KBS 제7기 장애인 앵커로 뽑힌 시각장애인 허우령이다. 그는 지난달부터 KBS1 ‘KBS 뉴스12’에서 생활뉴스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 쿠키뉴스와 유선상으로 만난 허우령은 “지금도 꿈만 같다”며 부푼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허우령이 앵커를 처음 꿈꾼 건 중학생 때다. 화가를 꿈꾸던 열네 살 소녀는 갑작스러운 시력 저하를 겪고 특수학교로 진학했다. 우연한 기회로 방송부에 들어간 그는 담임교사의 아침방송 아나운서 제의로 새 희망을 찾았다. “언제까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었어요.” 두려움을 이겨내고 시작한 방송부 일은 적성에 ‘딱’이었다. 마냥 두렵던 대본 읽기도 어느샌가 익숙해졌다. 자신감이 붙은 그는 교내행사 안내에 그치던 기존 방송을 학생들에게 사연을 받아 진행하는 라디오 형식으로 바꿨다. 뜨거운 반응은 그에게 방송쟁이의 피를 일깨웠다. 아나운서를 목표로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에 진학한 허우령은 보다 적극적으로 제 길을 찾기 시작했다. 유튜브 채널을 만들고 그는 새로운 세계에 다시금 눈을 떴다.
“학교에서 이론을 배웠다면 유튜브로는 말하는 기술을 익혔어요. 영상을 직접 찍어보니 발성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쉽지만은 않았다. 비장애인이 주를 이루는 아나운서 학원에서 그는 강사와 머리를 맞대고 자신에게 맞는 수강 방식을 찾아갔다. 각고 노력 끝에 합격 통보를 들은 날, 그에겐 기쁨과 걱정이 한꺼번에 몰아닥쳤다. 출퇴근이 막막해서다. 안내견 하얀이와 KBS가 위치한 여의도를 활보하며 차근차근 길을 익혔다. 사내에서는 선배 앵커, 장애인 활동 지원사에게 이동 보조를 받았다. 먼저 장애인 앵커로 일한 선배 기수들을 마음속 버팀목으로 삼았다.
허우령의 뉴스 준비 과정은 남들과 조금 다르다. 비장애인 앵커는 미리 받은 기사를 토대로 대본을 만들고 이를 숙지한다. 허우령의 일은 그 이후부터다. 그는 전달받은 뉴스 파일을 읽기 쉽게 고치고, 이를 점자와 음성 해설로 변환한다. 이후에는 음성을 들으며 대본을 최대한 외운다. 뉴스 후에는 자신을 비롯해 여러 앵커들의 뉴스를 모니터링하며 개선점을 찾는다. 발음 연습도 거르지 않는다. 그는 “앵커로 일한 뒤부터 뉴스를 정말 많이 본다”면서 “시청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뉴스를 잘 전달하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뉴스룸이 자아실현 무대라면 유튜브 채널은 자아표출의 장이다. 허우령은 3년 전부터 유튜브에 시각장애인이 겪는 평범한 일상을 공개하고 있다. 구독자만 11만명이 넘는다. 그는 “유튜브를 시작한 뒤 내 일상이 곧 콘텐츠란 사실을 느꼈다”고 말했다. “화장하는 모습이나 생리대 구매 같은 건 흔하디 흔한 일상이잖아요. 그런 것들을 시각장애인이 겪는다고 하니까 궁금해하는 분이 많더라고요. 영상에는 실수한 것도 고스란히 담고 있어요. 실수담과 함께 이런 게 어려워서 이런 방법을 택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거든요. 시각장애인 개인의 노력만으론 사회 도처에 널린 모든 한계를 극복할 수 없으니까요. 환경이 바뀔 필요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거죠.”
그는 어려움을 피하기보다 기꺼이 맞부딪히는 쪽을 택해왔다고 말한다. ‘장애인에겐 어렵다’는 말은 그에게 가장 큰 동기부여다. “잘 닦인 길을 가고 싶던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기회를 잡고 나만의 행운을 만드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았어요. 이제는 길이 없으면 만들려 해요. 기회가 오면 잡으려 하죠. 중요한 건 꾸준함이에요. 그리고 꾸준하려면, 하고 싶은 걸 해야 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삶은 포기와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는 “앵커라고 해서 뉴스만 진행하는 사람이고 싶진 않다”면서 “장애인 앵커가 가진 상징성이 있는 만큼, 여러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애인으로서 그는 모든 일이 동등히 여겨지는 세상을 바란다.
“장애인을 마냥 불쌍하게 여기지 않으면 좋겠어요. 장애를 극복했다거나, 그래서 위대하다는 등의 편견도 사라지길 바라요. 장애인이 일상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모습을 꿈꿔요. 지나가는 이에게 ‘어머, 사람이네!’ 하지 않잖아요. 드라마 속 배경으로 시각장애인과 안내견이 지나가는 게 자연스레 담기는 사회가 오길 원해요. 비장애인, 장애인 모두 서로를 조심스러워해요. 하지만 그럴수록 속으로 고민하기보단 함께 이야기를 나눠야죠. 우리는 편하게 질문하고 답하는 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시각장애인 앵커도 당연해지는 날이 오겠죠?”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