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스’ 이아름솔 “강한 신념으로” [쿠키인터뷰]

‘식스’ 이아름솔 “강한 신념으로” [쿠키인터뷰]

기사승인 2023-05-19 06:00:29
배우 이아름솔. EMK엔터테인먼트

16세 때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결혼해 남편만 바라보며 살았으나 결국 배신당한 이의 심정은 어떨까. 심지어 유산을 다섯 번이나 겪고, 남편의 외도는 셀 수도 없이 견뎠다면. 비운의 주인공은 헨리 8세의 첫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이하 아라곤). 그는 헨리 8세에게 이혼을 요구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30년 넘게 왕비 자리를 지켰다. 요즘 말로 ‘멘탈 갑’이라고 할까. 뮤지컬 ‘식스 더 뮤지컬’(이하 식스)은 역사가 삼킨 아라곤의 심정을 흥겨운 음악과 호쾌한 가사로 대변한다. 그는 노래한다. “넌 날 쉽게 생각해/ 이혼을 해달래/ 웃기지 마/ 노 웨이(No way·말도 안 돼)”

배우 이아름솔은 아라곤을 “한국적 정서와 맞닿은 인물”이라고 봤다. 감정을 밖으로 분출하기보단 속으로 삼키는 캐릭터라서다. 최근 ‘식스’가 공연 중인 서울 삼성동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에서 만난 이아름솔은 이렇게 말했다. “극 중 아라곤은 뾰족한 말들을 덤덤하게 안으로 누르는 인물이에요. 외유내강의 표본이라고 할까요. 실제 아라곤은 왕족 출신이라 어려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고 해요. 그 영향인지 어떻게든 자신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워 이혼을 요구하는 헨리 8세의 기세를 차분히 꺾었대요. 신념이 강하고 자존감 높은 여성이었던 거죠.”

‘식스’ 무대 위 이아름솔. 아이엠컬처

‘식스’를 만든 토비 말로우(작곡)와 루시 모스(연출)는 팝스타 비욘세와 샤키라를 토대로 아라곤을 구상했다고 한다. 그가 부르는 솔로곡 ‘노 웨이’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솔풀한 멜로디와 흥겨운 리듬이 두 알앤비 제왕의 음악과 꼭 닮았다. 아이름솔은 “노래 스타일만 비슷한 게 아니다”라고 했다. 성격도 닮았다는 것이다. 그는 비욘세가 2009년 싱가포르의 한 병원에서 환아들을 위해 무료로 공연한 일화를 예시로 들었다. “그 대단한 팝스타가 제대로 된 무대도 없이 노래를 불러요.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부르죠. 아라곤 역시 백성을 잘 돌보는 왕비였다고 해요. 헨리 8세가 돈을 주지 않자 자신의 보석을 팔아 신하들에게 월급을 줬대요.”

헨리 8세는 아라곤과 이혼하기 위해 종교와도 이별했다. 기존 국교였던 가톨릭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영국 국교회로 개종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아라곤은 수녀원으로 보내질 위기를 겪었다. 가부장제와 신분제가 지배하던 시대. 여섯 왕비는 남편에게 당한 수모를 교집합으로 서로를 이해하며 연대한다. 마지막 곡 ‘식스’(SIX)는 이들이 보낸 모욕의 시대를 위로하는 일종의 위령제다. 이아름솔은 “처음엔 우느라고 노래를 거의 못 불렀다”면서 “우리의 삶은 비참했지만 단 5분 만이라도 우리의 역사를 다시 써보자는 메시지가 마음을 쿵쿵 쳤다”고 돌아봤다.

연습실도 툭하면 눈물바다가 됐다고 한다. 배우들이 왕비들의 아픔을 자신의 상처인 양 마음 깊이 받아들여서다. 헨리 8세의 왕비들은 하나같이 말년이 불행했다. 참수형을 당한 이가 둘, 이혼을 요구받은 이 또한 둘이었다. 심지어 헨리 8세의 유일한 사랑으로 알려진 왕비마저 아들을 낳고 산욕열로 세상을 떴다. 이아름솔은 “연습 말미 각자 배역으로서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담담히 얘기하려고 했지만, 아라곤이 겪었을 치욕을 생각하니 감정조절이 안 됐다.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진심이 통한 걸까. ‘식스’는 예매처 인터파크에서 평점 9.8점(5월18일 기준)을 기록 중이다. 제작사는 이달 말부터 다음 달 초까지 5차례에 걸쳐 관객이 함께 노래를 부르는 싱어롱 이벤트를 열 계획이다.

‘식스’ 공연 실황. 뒷줄 맨 왼쪽이 이아름솔. 아이엠컬처

TV에선 ‘경단녀’였던 중년이 꿈을 찾아 자아를 실현하고(JTBC ‘닥터 차정숙’), 영화에서는 중학생 딸을 둔 엄마가 1급 킬러(넷플릭스 ‘길복순’)로 활약하는 시대. 이아름솔은 “공연계에서도 여성 서사물이 늘었다”고 귀띔했다. ‘여자는 성녀 아니면 창녀’로 분류되던 시기를 지나 “여성의 주체적인 삶을 다룬 작품이 많아졌다”는 설명이다. 이아름솔은 여성 서사물과 연이 깊다. 39세 여성 엘리자베스의 일과 사랑을 다룬 ‘이프/덴’, 미국 여성 작가 실비아 플라스의 작품과 삶을 각색한 ‘실비아, 살다’, 브론테 자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브론테’ 등을 거쳐왔다. 차기작 역시 온통 여성 배우들로만 채워진 ‘프리다’다. 그는 “시대가 바뀌었으니 예술도 달라지는 것”이라며 “관객들도 여성 서사에 목말라 있었음을 느낀다”고 했다.

그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들도 어깨를 겯는 여성들이다. 함께 무대에 오르는 배우와 연주자, 객석을 지키는 관객들 등 주변 사람들에게서 좋은 에너지를 얻는다고 이아름솔은 말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배려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저는 배우 이아름솔과 인간 이아름솔을 구분하지 않아요. 일상에서의 제가 무대에서도 드러난다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제 데뷔일을 기부로 기념하는 팬들을 보며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자는 생각을 자주 해요. 그렇게 멋진 친구들이 제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힘을 받죠. 저도 제가 가진 것들을 움켜쥐지 않고, 자연스레 흘려 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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