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마고 로비는 영화 ‘바비’(감독 그레타 거윅)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로비는 자신이 설립한 제작사 럭키챕 엔터테인먼트(이하 럭키챕)를 통해 마텔사에 영화화를 제안, 바비 프로젝트를 태동시켰다. 여러 할리우드 제작사의 러브콜에도 꿈쩍 않던 마텔을 움직인 건 로비의 강렬한 소갯말. “우리는 럭키챕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바비를 영화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말을 기점으로 럭키챕은 ‘바비’를 위한 전초작업에 돌입했다. 로비는 ‘작은 아씨들’의 그레타 거윅 감독에게 연출을 직접 제안했다. ‘바비’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로비는 제작 전반을 관리하며 주인공 바비까지 도맡아 극을 이끌었다. ‘바비’의 시작과 끝을 로비가 책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로비에게 ‘바비’는 주요한 의미를 지닌다. 배우이자 제작자인 그는 전 세계에 너른 인지도를 갖춘 바비의 지식재산권(IP)에서 큰 잠재력을 발견했다. 하지만 동시에 조심스러웠다. 바비 인형이 이상적인 여성 신체 형태를 규정하고 정형화했다는 비판이 있어서다. 때문에 ‘바비’는 시작부터 바비 인형의 의의를 다시 되새긴다. 바비 인형의 탄생이 여자아이에게 엄마 역할을 학습시키던 아기 인형을 대체하고, 역할놀이를 다양하게 확장시켰다는 점을 짚어 페미니즘과 바비 인형을 자연스럽게 연결 짓는 식이다. 거윅 감독과 로비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결과다.
가장 섹시한 금발 미녀. 2013년 할리우드는 로비를 이렇게 정의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로비는 더 이상 금발·여성·배우라는 틀에만 갇혀있지 않다. 이제 그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유망한 제작자로 손꼽힌다. 로비가 2014년 남편과 공동 설립한 럭키챕을 통해서다. 럭키챕은 오는 19일 개봉을 앞둔 ‘바비’를 비롯해 유수 영화제에서 상을 휩쓴 ‘아이, 토냐’(감독 크레이그 길레스피), ‘프라미싱 영 우먼’(감독 에머랄드 팬넬), ‘버즈 오브 프레이(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감독 캐시 얀, 이하 버즈 오브 프레이) 등 다수 작품을 만든 제작사다.
로비는 여성 예술가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제작에 뛰어들었다. 로비는 과거 하퍼스바자와 인터뷰에서 제작사를 세운 이유를 “자신이 아내이거나 여자친구로만 나오는 대본을 선택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설명했다. 데뷔 초 그의 정체성은 금발 미녀 배우에 머물러있었다.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감독 마틴 스콜세지)와 ‘수어사이드 스쿼드’(감독 데이비드 에이어)로 이름을 알렸으나 극 중 캐릭터들의 모습은, 당연하게도 실제 로비와 거리가 멀었다. 몸에 꽉 끼는 의상부터 관리하기 어려운 머리모양은 그에게 그저 불편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이를 불편해하는 로비의 고충을 헤아리기보다는 더 화려해진 외모에 주목했다. 극에서도 로비는 철저하게 남성 중심으로 짜진 이야기 구조 속에서 촉매제로만 기능했다. 로비는 지난해 월스트리트저널에 “작품을 고를 때면 늘 남성 캐릭터를 맡고 싶었다”면서 “반대로 사람들이 우리가 제작하는 대본을 보며 여성 캐릭터를 탐낸다면 정말 멋지지 않을까. 그 생각으로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로비와 럭키챗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건 첫 작품인 ‘아이, 토냐’다. 촬영에 돌입하기에 앞서 로비는 “이 역할은 못 생겨야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고 한다. 금발 미녀가 아닌 배우 자체로 살아남고자 골몰하던 그의 선언과도 같았다. 복잡한 감정을 담아낸 로비의 통렬한 연기는 전작에서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그가 연기했던 캐릭터들이 그만큼의 감정을 허용받은 역할이 아니어서다. 바람 대로 ‘아이, 토냐’는 여성 예술가로서의 로비를 재정립하는 기점이 됐다. 골든글로브와 오스카 시상식 후보로 지명된 데 이어 그해 타임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도 이름 올렸다.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로 로비를 발굴했던 스콜세지 감독은 당시 타임지에 이 같이 적었다. “로비는 캐롤 롬바드의 만능적인 열정과 조안 크로포드의 단단한 강인함을 가졌으나, 궁극적으로는 누구와도 같지 않은 사람이다.” 2018년 미국 버라이어티지는 로비를 주목할 만한 제작자 10인으로 선정하고 그를 ‘배우 겸 제작자’로 정의했다.
럭키챕은 단순히 배우로서의 로비를 홍보하는 수단이 아니다. 로비는 럭키챕이 제작하거나 제작을 앞둔 작품 상당수에 출연하지 않는다. 다만 여성 예술가를 위해 영향력을 아낌없이 활용한다. 여성이 중심을 이루는 이야기를 생산하고 여성 예술가를 조명하는 영화 및 TV 프로젝트에 꾸준히 투자를 이어가는 게 그 예다. 때로는 기존에 정의 내려진 캐릭터의 고정관념을 바꾸기도 한다. 할리 퀸이 대표적이다. 로비는 할리 퀸만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버즈 오브 프레이’를 제작하며 할리 퀸 캐릭터를 다시 조립했다. 치렁치렁했던 긴 머리는 싹둑 자르고 불편한 노출 의상 대신 움직이기 편한 옷을 입었다. 할리 퀸을 쥐락펴락하던 남자친구 조커 모습 역시 찾아볼 수 없다. 로비는 ‘버즈 오브 프레이’ 개봉을 앞뒀던 2019년 보그에 “남성들의 시선으로부터 이전보다 자유로워진 걸 느낀다”고 말했다.
할리우드는 여성이 주축을 이뤄 기존 영화 권력의 통제에서 벗어나 영향력을 키워가는 럭키챕을 주목했다. 미국 매체 버즈피드는 “로비는 럭키챕을 통해 배제됐던 여성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권한을 부여한다”면서 “로비 역시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던 금발 배우에서 강력한 제작자로 변신했다”고 평했다. 육감적인 금발 미녀로만 소구되던 그가 스스로 운명을 바꿔나간 셈이다.
이제 로비는 ‘바비’로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바비’는 사회가 암묵적으로 규정하던 성별의 지위와 역할, 기원을 뒤바꾼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바비와 달리 켄의 직업은 “그냥 해변(just beach)”이다. 바비가 매일 축제 같은 삶을 사는 것과 반대로 켄은 바비가 자신을 봐줘야만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다. 바비에게 켄은 액세서리에 지나지 않는다. ‘바비’ 세계관에서 이는 당연하다. “바비가 켄보다 먼저 출시돼서”(그레타 거윅)다. 마텔사가 바비의 짝 역할로 뒤늦게 출시한 켄은 극에서도 바비를 빛나게 하는 도구로 쓰인다. 3년 전 할리우드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로비는 이렇게 자부했다. “바비 인형을 연기하는 제 모습이 쉽게 상상된다는 반응이 있었어요. 하지만 무엇을 생각하든 간에, 완전히 다른 걸 보여줄 거예요. 당신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하지만 분명히 원했던 어떤 것을 만나볼 수 있을 겁니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