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대학에 입학하기 수년 전 설악산 대청봉을 올랐다. 난생처음 설악산을 찾았던 아이는 무척 힘들어했다. 그러나 해 질 녘 중청대피소에 도착해보니 발아래 수많은 암봉과 운무가 어우러져 있었다. 아이는 이내 긴장을 풀고 설악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그리고 다음 날 대청봉에 올라 태양을 함께 맞이했다. 설악산 대청봉 그리고 중청대피소는 그렇게 우리 부녀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됐다.
지난주, 산악회 대화방은 종일 뜨거웠다. 설악산 중청대피소가 9월 중순까지 운영되고 철거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숙박을 금지한다.)
산우들도 나처럼 그곳에 추억이 있었다. 대청봉을 바로 곁에 두고 광활하고 신비로운 절경을 보며 휴식을 취하거나 설악의 석양과 일출을 맞았던 기억이었다. 적어도 우리나라 산꾼들에게 중청대피소는 내 안의 모든 기운을 짜내 올라 얻어냈던 가장 아름답고 드라마틱한 성취이자 찐한 추억의 장소일 것이다.
2017년 한 정치인이 “대피소가 대피소로 기능하지 않고 숙박시설처럼 비정상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립공원공단은 당장 시설 노후화와 환경 훼손 등의 사유로 중청대피소를 철거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대피소에서 담요를 없애고 물품 판매 항목도 17종에서 10종을 줄였다. 그 뒤 대피소 숙박을 위해서는 침낭이나 담요를 준비해야 하고 라면 등을 챙겼다. 그 험한 길을 오르는 등산 배낭이 더 무거워졌다. 아름다운 국립공원을 지키기 위한 조치이기에 당연히 감수해야 할 수고라고 생각했다.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설치가 사실상 확정됐다는 것이다. 오색에서 끝청 상부까지 구간이란다. 발표대로라면 케이블카를 타고 끝청에서 내려 1km가 채 되지 않은 등산로만 오르면 대청봉에 닿을 수 있다. 케이블카 개통과 함께 새로 등장할 중청대피소는 어떤 모습일까? 기념품을 팔고 음식을 파는 멋진 풍광을 보유한 관광명소가 될까?
중청대피소가 없어지면 설악산 등산 코스도 꼬여버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진저리나는 깔딱고개인 오색에서 대청으로 오르는 코스를 보자. 대청봉에 오르면 심신은 지칠대로 지쳐버린다. 대청봉에서 한계령 또는 백담사 방면으로 하산을 하든가 서북능선이나 공룡능선 등지로 산행을 이어가야 한다. 하룻밤 머물 곳은 고사하고 먹을 물을 보충할 곳도 마땅치 않다.
중청대피소 대안으로 규모를 확장한다는 희운각대피소까지 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약 3km의 가파른 산길을 두어 시간을 더 걸어 내려와야 한다. 대청을 오르기 위해 힘을 소진했다면 안전사고 위험도 그만큼 크다. 더구나 희운각대피소는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조망도 없다. 능선 안부에 자리 잡고 있는 중청대피소에 비해 폭설이나 폭우에도 취약하다.
국립공원관리공단과 해당 지자체는 하루든 이틀이든 잠을 자지 않고 산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설악산 등산로에 도전하지 말라는 뜻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배테랑 산꾼들도 힘들어하는 그 길을 포기하고 많은 사람들이 케이블카를 택할 수 밖에 없다. 산행 경험이 부족한 일반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대화방에서 한 산우는 “등산객에게 필요한 시설은 없애고 이래저래 불편만 더 가중하고 있다”며 “케이블카는 돈이 되고 대피소는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고 이번 결정을 비난했다. 다른 국립공원에서도 케이블카를 설치하려 할 것이라며 우려했다.
“금강산은 너무 드러나서 마치 길가에서 술 파는 색시 같고, 설악산은 깊은 골에 숨어 범접하기 힘든 미녀 같다.”
육당 최남선의 표현이다. 그는 당시 금강산의 명성에 가려 있던 설악산을 더욱 아름답다고, 고결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철조망에 가로막혀 금강산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지금, 설악은 오히려 금강보다 더 큰 길가에 나앉게 됐다.
우리나라 국립공원은 관광 개발예정지가 아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적 가치가 있기에 나라에서 보호하는 곳이 국립공원의 본 뜻이다. 그 취지를 잃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최기영 (산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