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언제나 몸을 45도로 틀어 걸었다. 마주 오는 이가 인사라도 할라 치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말을 자주 안 하다 보니 목은 늘 잠겨 있었다.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위축되고, 응축돼 있던 자아. 넷플릭스 오리지널 ‘마스크걸’에서 배우 안재홍이 만들어낸 주오남의 이야기다. 주오남은 예고 영상에 1초가량 등장했을 때부터 화제였다. 원작을 고스란히 재현한 외형 때문이다. 본편 공개 이후에는 ‘웹툰을 찢고 나왔다’, ‘이거 찍고 은퇴하려는 거 아니냐’, ‘이 정도면 연기 차력쇼’, ‘연기 좀 조금만 살살해달라’ 등 갖가지 반응이 잇따랐다.
25일 서울 역삼동 한 카페에서 만난 안재홍은 이 같은 인기에 “얼떨떨하다”고 했다. 동명 웹툰을 각색한 ‘마스크걸’은 지독한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한 여자가 세 건의 살인사건에 얽히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 김모미를 신예 이한별과 나나·고현정이 연령대별로 나눠 연기했다. 김모미의 숨통을 억죄는 김경자는 염혜란이, 김모미의 정체를 알아챈 직장동료이자 김경자 아들 주오남 역은 안재홍이 연기했다. 주오남의 등장·퇴장과 함께 극은 본격적으로 폭주하기 시작한다.
모두가 높은 싱크로율을 보였지만, 역시나 압권인 건 주오남이다. 원작과 흡사하게 구현한 외형은 물론, 일본 문화에 푹 빠진 특성까지 차지게 살려서다. 안재홍은 주오남이 되기 위해 매번 2시간에 걸쳐 분장을 받았다고 한다. 두피가 훤히 보이는 탈모 증상부터 특유의 살집 있는 몸을 표현하고자 특수분장 조끼를 옷 안에 걸쳤다. 열감이 느껴지는 피부 톤을 잡기 위해 분장 감독과도 세세히 의견을 나눴다. 분장은 주오남을 키고 끄는 스위치와 같았다. 제작 당시 영화 ‘리바운드’(감독 장항준)와 촬영 기간이 일부 겹쳤던 때에도 분장만 거치면 작품에 금세 몰입할 수 있었단다. 주변 도움을 받아 외면을 주오남답게 꾸몄다면, 내면 탐구는 오롯이 제 몫이었다. 안재홍은 주오남의 대사에서 힌트를 얻었다.
“모미와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오남이 이런 말을 해요. ‘처음이었어, 누군가에게 이런 감정을 갖는다는 건.’ 그를 잘 보여주는 대사라 생각했어요. 주오남은 안타까운 선택을 거듭하다 결국 파국에 다다르잖아요. 김모미라는 대상을 두고 삐뚤어진 깊은 마음을 갖다가 집착·망상을 키워가죠. 다분히 만화적인 주오남 캐릭터를 현실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인물로 보이게 하고 싶었어요. 여러 디테일을 고민하며 드라마판 주오남을 만들었습니다.”
안재홍은 주오남이 할 법한 생각과 말들을 골몰하곤 했다. 대본에 이어 원작을 살피던 그의 눈에 일본어를 중얼대는 주오남이 들어왔다. 이에 착안해 그는 김용훈 감독에게 일본어 대사를 넣자고 제안했다. “우리 주오남도 개인적이고 사소한 순간에 툭 일본말이 나오면 어떨까 했다”는 설명이다. 2회 초반 생일 축하 장면과 모미의 일탈 방송에 분개하는 모습이 그의 제안을 거쳐 재탄생했다. 상상 속에서 모미에게 고백하다 ‘아이시떼루’(‘사랑해’의 일본 표현)라고 외치는 장면은 즉석에서 나온 애드리브다. 감독과 상대 배우 이한별은 당황한 반면 현장 스태프는 웃음을 터뜨렸단다. 해당 장면 역시 공개 직후 화제였다. 전작을 함께한 장항준 감독에게까지 그를 칭찬하는 연락이 쏟아졌을 정도다.
쉽지 않은 역할임에도 뛰어든 건 새로움을 향한 갈망 때문이다. “시도한 적 없던 캐릭터를 보여줄 귀한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단다. 도전은 뚜렷한 결과물을 남겼다. ‘마스크걸’은 공개 사흘 만에 넷플릭스 톱 10 비영어권 부문 2위에 이름 올렸다. 그는 공을 감독에게 넘겼다. 낮과 밤이 다른 주오남의 이중적인 삶은 다양한 화면 전환 기법으로 그려진다. 동일한 장면을 1·2회에서 각기 다른 시점으로 다루며 의도적으로 주오남을 덜 보이게 연출한 점 역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김 감독님이 설계한 구조와 구성의 미학”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던 그는 “대본 구성부터 신선했다. 덕분에 ‘마스크걸’만의 재미가 나왔다”며 흡족해했다.
올해 ‘리바운드’와 ‘마스크걸’ 등 상반된 작품을 선뵌 안재홍은 “진짜 같은 순간을 만드는 연기”에 푹 빠졌다. 그는 “어떤 캐릭터든 실존인물처럼 생생하게 표현하려 한다”고 힘줘 말했다. “캐릭터를 충실하게 표현하면 현실에 존재하는 듯한 때를 만나곤 해요. 연기자로서 그 순간을 언제나 원하고 기다려요.” 용기를 갖고 임한 주오남은 그에게 또 다른 이정표를 남겼다. 안재홍은 “일반적이지 않은 캐릭터로 뜨거운 반응을 맛봐보니, 마냥 들뜨기보단 더 잘 해내고 싶다는 욕심이 선명해졌다”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면서도 즐거움을 주는 연기를 하고 싶다”며 눈을 반짝였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