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같이 쏟아지는 시나리오의 홍수 속에서 새로움을 찾기란 쉽지 않다. 오랜 기간 배우로 살아온 정유미에게는 특히나 그랬다. 어떤 이야기에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할 무렵, 2년 전 발견했던 한 영화 시나리오가 그의 마음을 세차게 두드렸다. 남편의 수면장애로 평범한 신혼부부의 일상이 무너지는 미스터리 스릴러. 군더더기 없는 내용에 호기심부터 일었다. 감독을 만난 정유미는 곧장 출연을 결정했다.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러브스토리, 그 한 문장에 마음이 동했어요.” 지난달 22일 서울 안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정유미가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그에게서 촬영할 결심을 이끌어낸 작품은 6일 개봉한 영화 ‘잠’(감독 유재선).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감독에게 호기심이 돋았던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대답에 ‘이 작품이구나’ 싶었단다. “이런 표현을 쓰는 감독님은 영화를 어떻게 찍을지 궁금했어요. 촬영한 대로 결과물도 잘 나왔더라고요.” 씩 웃으며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시원시원했다.
‘잠’은 신혼부부가 마주하는 굵직한 사건을 세 장으로 나눠 전개한다. 수면 중 이상행동을 처음으로 발견하는 제1장을 시작으로 출산 이후를 다룬 제2장, 그 이후 변화를 그린 제3장으로 이야기가 뻗어나간다. 정유미가 연기한 수진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가족에 집착하는 인물이다. 남편 현수(이선균)가 잠에 들면 기괴한 기행을 펼치지만 그와 도통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수진은 각 장으로 넘어갈수록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정유미는 “계산하지 않고 연기하려 노력했다”고 돌아봤다.
“변한다는 걸 염두에 두고 연기하진 않았어요. 장마다 달라지는 세트와 미술, 조명, 분장, 그로 인해 조성되는 분위기에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주어진 상황에 충실하게 임하기만 해도 될 정도였거든요. 그럼에도 생각했던 것 이상의 모습이 나오기도 했어요. 감독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방향성을 잡아가곤 했죠.”
정유미는 유재선 감독에게 믿음이 컸다고 재차 강조했다.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이렇게 표현해야 한다’고 그림이 그려졌을 정도”다. 지문마저 짧은, 간결한 각본을 읽으며 자신이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해지곤 했단다. 촬영 전부터 생긴 신뢰는 영화를 만들어가며 더욱 공고해졌다. “이런 작업이 내겐 의미 있을 거라 생각했다”는 설명이다.
“감정 진폭이 큰 드라마가 어렵지만 재미있듯, 짧고 심심한 이 작품이 색다른 재미를 줄 거란 판단이 섰어요. 첫인상부터 신선했어요. 두 번째로 든 생각은 ‘내가 이런 것도 해보고 싶었구나’는 깨달음이었죠. 시나리오가 워낙 명확한 덕에 촬영하면서도 어려움이 없었어요. 배우가 따로 아이디어를 내지 않아도 될 만큼 모든 것들을 충분히 설명하는 각본이었거든요.”
‘잠’은 94분 동안 여러 장르를 넘나든다. 일상 드라마였다가 스릴러로, 모호함이 강조되자 미스터리로, 시시각각 다른 외피를 두르는 중심에는 사랑이 있다. 지난봄, 칸에서 ‘잠’을 미리 본 이들은 다양한 장르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점을 높이 샀다. 정유미의 광기 어린 눈빛에도 좋은 반응이 잇따랐다. 인상 깊은 평가들을 이야기하자 “더 미칠 걸 그랬다”고 맞장구 치는 얼굴이 환했다.
작품 선택에 있어 감독과 호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유미에게 ‘잠’은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감독이 그리는 대로 해내는 게 배우의 역할”이라고 말을 잇던 그는 “안은영(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 김지영(영화 ‘82년생 김지영’)이 그랬듯 수진을 충실히 구현하는 것에만 집중했다”고 힘줘 말했다. 인상 깊은 캐릭터를 여럿 연기한 그는 “많은 인물이 돼봤어도 여전히 주열매(tvN ‘로맨스가 필요해 2012’)와 한여름(KBS2 ‘연애의 발견’)이 마음에 남곤 한다”면서 “이런 캐릭터들을 또 만나고 싶다. 재밌을 만한 장르로 돌아오겠다”며 미소 지었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