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밀’을 연출한 임경호, 소준범 감독은 제작에 돌입하기 전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배우 김정현이 주인공 동근 역할을 맡겠노라 결정한 것이다. 한 살인사건을 파헤치던 강력반 형사가 잊었던 과거와 마주하며 벌어지는 추적 스릴러. 학교와 군대 내에서 벌어지는 폭력 등 각종 사회 부조리를 다룬 이 영화에 김정현이 출연할 거라곤 감독들도 전혀 예상치 못했단다. 김정현의 선택을 이끈 건 다름 아닌 동근의 대사 한 줄. “‘이 또한 지나가리라’에 마음이 먼저 동했어요.” 지난 6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정현이 들려준 이야기다.
‘비밀’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동근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김정현은 이전부터 그 문장을 좋아했다고 한다. 팬들에게 그 문구를 적어 선물한 적도 있단다. 평소 좋아하던 문장으로 시작하는 시나리오를 보자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느껴졌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자신이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는 여지가 보였다. 김정현은 자연스럽게 ‘비밀’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쉬운 현장은 아니었다. 23회 만에 모든 촬영을 종료해야 했다. 일정이 촉박했던 만큼 두 감독은 높은 완성도를 위해 노력을 거듭했다. 김정현 역시 어깨가 무겁긴 마찬가지. 평소 제 작품을 다시 보지 않는다던 김정현도 ‘비밀’만큼은 상영관을 끝까지 지켰다고 한다. “내 연기는 보기 힘들지만 다른 분들의 연기와 작품의 흐름이 궁금해서”였다. 여러 곡절을 거쳐 2년 만에 개봉한 작품인 데다, 극이 담은 메시지도 진하다. 김정현은 “보고 나면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고 자평했다.
첫 형사 역을 연기한 그는 내외적으로도 여러 준비를 거쳤다. 수염을 기르고 피부색을 어둡게 분장하는 것부터 시작해 몸집도 우람히 키웠다. 감독과 상의를 거쳐 제 생각을 캐릭터에 여럿 반영했다. 가장 대표적인 게 형사로서의 동근의 태도다. “투철하기보다는 타성에 젖은 형사여야 과거를 망각한 게 더 큰 죄책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김정현의 판단을 감독들은 쌍수 들고 환영했단다. 김정현은 “동근은 정의의 사도가 아닌 가해자”라며 “감정적인 연기를 배제하곤 아무런 사명감을 갖지 않으려 했다”며 의도를 설명했다.
데뷔작인 ‘초인’(감독 서은영) 이후 오랜만에 주연을 맡은 영화다. 그 사이 김정현은 대중 인지도를 쌓아가며 성장하다 개인사로 논란 중심에 섰다. 배우로서의 삶을 고민하던 때 만난 게 ‘비밀’이다. 김정현은 “일련의 일들을 망각하지 않으려 한다”면서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는 게 삶인 만큼 나 또한 새로이 발전하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언제나 갈증을 느끼고 싶어요. 욕심일지 모르겠지만, 제 연기에 평생 만족하지 않고 싶거든요. 연기자로서 원동력을 얻는 건 단 하나뿐이에요. 작품을 통해 전한 이야기가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 거기서 김정현이라는 배우가 새로운 발견까진 아니어도 또 다른 발견 정도면 성공이죠. ‘비밀’이 바로 그런 작품이길 바랍니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