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땅에서도 꿈은 자랐다…‘일 테노레’ [쿡리뷰]

빼앗긴 땅에서도 꿈은 자랐다…‘일 테노레’ [쿡리뷰]

창작 뮤지컬 ‘일 테노레’ 리뷰

기사승인 2024-01-06 06:00:15
뮤지컬 ‘일 테노레’ 공연 장면. 윤이선 역의 배우 박은태. 오디컴퍼니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짐이 있다. 누구의 짐이 더 무겁냐는 질문은 어리석다. 직접 짊어지기 전까진 짐의 무게를 말할 수 없는 법. 꿈도 그렇다. 누구의 꿈이 더 빛나는지 가릴 도리가 없다. 누가 더 간절히 꿈꾸는지 판가름할 방법도 없다. 지난달 19일 개막한 뮤지컬 ‘일 테노레’는 자기 몫의 짐을 진 청년들의 이야기다. 자기만의 꿈을 꾸는 청춘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배경은 일본의 문화 말살 정책이 활개를 치던 1930년대 경성. 작품은 조선 첫 테너 윤이선과 그 친구들을 통해 빼앗긴 땅 위에서도 꿈을 키우던 이들을 보여준다. 

이선은 의대생이다. 항일운동에 투신하는 대학생 단체 문학회 회원이기도 하다. 얼핏 위인전에서 볼 법한 인물 같다. 그러나 겉모습은 위인과 거리가 멀다. 자신감이 부족해 늘 ‘쭈구리’ 신세다. 이선에겐 죽은 형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형도 의대생이었다.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형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책임이 이선을 짓누른다. 그 중압감 속에서 그는 이제 막 오페라 무대에 오를 참이다. 데뷔하면 조선 첫 테너가 된다. ‘동양 제일의 테너’로 극찬받은 오페라 가수 이인선(1907~1960)이 실제 모델이다.

의학을 공부하던 이선은 어쩌다 오페라에 빠졌을까. 1막은 이 과정을 경쾌하게 펼친다. 이선은 문학회 리더 서진연에게 감명받는다. 외교관을 꿈꾸는 그는 리더십이 강하다. 하루라도 빨리 총칼을 들어야 한다는 친구 이수한을 설득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진연과 문학회는 연극으로 항일정신을 드높이려 한다. 일본도 호락호락하진 않다. 조선에 관한 공연을 모두 금지한다. 이선과 진연은 오페라 ‘꿈꾸는 자들’을 올릴 계획을 세운다. 오스트리아에 맞서 독립운동을 한 베네치아 사람들의 이야기다. 조선과 처지가 비슷한 베네치아를 통해 민중의 애국심을 고취할 속셈이다.

‘일 테노레’ 공연 장면. 오디컴퍼니

시대가 어둡다고 꿈마저 칙칙할까. 작품은 비장함을 덜어냈다. 어리바리한 이선과 매사에 확고한 진연의 소동이 웃음을 자아낸다. 둘은 꿈과 함께 사랑도 키운다. 떠들썩한 안무 연습이 끝나고 둘만 남은 이선과 진연 사이로 “하고 싶은 말/아직 너무 많은데~”라고 노래가 시작하면 관객은 가슴이 설렌다. 작품은 문학회가 오페라를 준비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관객을 꿈꾸게 하다가도 일본 경찰을 등장시켜 긴장감을 높인다. 음악 없이 일본어로 대화하는 경찰들 모습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김동연 연출의 솜씨다. 음악과 극작은 ‘윌휴’(작곡가 윌 애런슨, 작가 박천휴) 콤비가 맡았다. 

작품에 나오는 ‘꿈꾸는 자들’은 가상 오페라다. 오페라 노래 ‘꿈의 무게’ ‘그리하여 사랑이여’ ‘꿈꾸는 자들’이 여러 번 나온다. 멜로디는 꿈결 같고 가사는 시적이다. 이선을 맡은 배우 박은태의 미성과 궁합이 좋다. 격랑의 시대, 한 조각 꿈을 붙든 청년의 순수함을 음표로 그린다. 연기력도 물이 오를 대로 올랐다. 노인 분장을 하고서 부르는 ‘꿈의 무게’가 압권이다. 이선은 꿈을 이룬 순간 사랑을 잃었다. 또 다른 상실은 짐이 돼 그를 짓누른다. 박은태는 혼신을 다해 부르는 이 곡에 이선이 홀로 보낸 세월을 압축한 듯하다. “이젠 나의 지친 몸을 쉬게 허락해주오/ 마지막 이 노래”라는 절창에서 회한과 그리움, 분노가 아른댄다. 

뮤지컬 ‘지킬앤하이드’ ‘스위니토드’ ‘드라큘라’ 등을 한국에 들여온 오디컴퍼니의 첫 창작 뮤지컬이다. 소재는 한국적이지만 청년들의 꿈을 주제로 해 보편성을 갖췄다. 캐릭터마다 서사가 탄탄하고 이야기가 흘러가는 리듬도 경쾌하다. 2막 후반부는 슬픔에 과하게 천착해 개선할 여지가 있다. 배우 홍광호와 서경수가 박은태와 함께 이선을 연기하고, 진연 역엔 김지현·박지연·홍지희가 캐스팅됐다. 수한은 전재홍과 신성민이 나눠 맡았다. 공연은 다음 달 25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이어진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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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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