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평범한 시민 덕희(라미란)는 큰 난관에 부딪혔다. 집은 불타고 생계를 책임져야 할 아이는 둘이나 되는데 수중에 돈이 없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출을 받으려 하지만 보이스피싱에 속아 있는 돈을 죄다 털렸다. 그런 덕희에게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자신을 등쳐먹은 범인의 제보를 두고 덕희는 어떤 선택을 할까.
영화 ‘시민덕희’(감독 박영주)는 2016년 일어난 실화를 스크린에 그대로 옮긴 작품이다. 실화는 영화보다도 더욱 영화 같다. 경기 화성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던 한 중년 여성이 보이스피싱범에게 받은 제보를 경찰에 알리지만 수사는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 이에 다양한 증거를 모아 경찰에게 전달, 총책 검거에 기여한다. ‘시민덕희’는 이 같은 묵직한 실화를 각색해 보는 맛을 끌어올린다.
덕희의 여러 감정을 쏟아내듯 표현하는 배우 라미란의 연기가 극 내내 돋보인다. 덕희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피싱 범죄에 당해 벼랑 끝으로 몰린 그는 울분에 차 “고상하게 우아 떨 형편도 안 된다”고 일갈한다. 하지만 경찰 협조는 요원하다. 콜센터 주소가 없고 사건이 종결돼 조사를 할 수 없다고 뻐긴다. 이 상황에서 소시민 덕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전단지를 뿌려 다른 피해자를 찾고 진술서와 피해 계좌를 수집하지만 경찰은 역시나 수사에 나설 생각조차 없다. 설상가상으로 세탁공장 라커룸에서 숙식한다는 신고로 인해 아이들과도 생이별하고 눈물을 쏟는다. 덕희가 중대한 결심을 할 때마다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라미란의 감정 연기가 극의 재미 요소다.
덕희에게 제보 전화를 한 재민(공명)의 상황도 좋지만은 않다. 회의감을 느껴 도주를 시도하지만 후환이 두려워 마음을 고쳐먹는 재민. 하지만 죄책감에 시달린 그는 이 일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목숨 걸고 세 번의 제보를 전할 정도로 그는 절박하다. 이 모든 판을 꾸민 총책(이무생)은 잔혹하기 그지없다. 덕희는 재민의 제보를 구체화해 한국 경찰을 설득하기에 다다른다. 이 모든 과정이 군더더기 없이 빠른 속도로 이어져 몰입감을 더한다. 결말을 알면서도 집중하며 보게 되는 힘이 있다.
‘시민덕희’는 적절한 시점에서 극적 재미를 살린다. 덕희, 재민 등 인물에게 적절히 서사를 부여하고 감정에 공감할 여지를 남겨둔다. 시민 덕희의 목소리가 가닿지 않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담은 연출을 비롯해 관객이 작품에 감응할 대목을 곳곳에 마련했다. 작품은 전반적으로 친절하다. 사건의 분기점마다 시점을 짚어주며 이해를 돕는다. 보이스피싱 피해 사례를 이야기할 땐 다소 공익적인 느낌까지 든다. 이 가운데 긴장감을 자아내야 할 부분에선 힘을 확실히 준다. 실화를 가벼이 여기지 않으면서도 오락영화로서 본분을 다한다. 라미란과 염혜란의 협업도 좋다. 장윤주가 다소 과한 연기를 보여줄 때도 이들이 중심을 잡는다. 공명은 겁먹으면서도 용기 내는 재민을 차지게 표현해 캐릭터에 이입을 돕는다. 총책을 연기한 이무생은 짧은 등장에도 인상 깊은 활약을 해낸다.
‘시민덕희’는 지향점이 분명한 영화다. 목표가 확실하다 보니 덕희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작품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화려한 액션이 나오는 수사극은 아니다. 제목 그대로 평범한 시민 덕희의 처절한 추적극이다. 길이감도 적당하다. 무난하게 보기 좋다. 오는 24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등급. 상영시간 114분.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