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사할린 땅에 아버지를 계속 두는 것이 마음 아플 것 같은데요.
“시간이 없습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아버지 유해를 반드시 모셔 와야 됩니다. 어머니 나이가 올해 여든 여덟이십니다. 아버지 묘소를 찾고도 저렇게 아버지를 추운 땅에 계속 둬야 하는 것이 화가 납니다. 그동안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지원위원회)나 국회의원들에게 유해봉환 예산을 마련해달라고 요구해 왔지만 결국 무산됐습니다. 우리나라에 살면서 이렇게 화가 나기는 처음입니다.”
-유해봉환을 위한 예산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는데요.
“이유는 듣지 못했습니다. 아마 시급한 사안이 아니라 생각했겠지요. 지원위원회는 2011년에는 유해봉환 사업을 하지 않고 조사업무만 벌였습니다. 그래서 2012년에는 유해봉환사업을 할 수 있도록 예산을 늘려 신청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또 위원회가 2011년까지만 일을 하고 해산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국회의원들에게 편지를 보내 위원회 활동 기간을 늘려 달라고도 호소했습니다. 다행히 위원회는 2012년 12월까지 1년 더 활동을 연장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3억원 정도의 유해봉환 예산은 결국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이제 정부의 도움을 바라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개인적으로 유해봉환을 하는 방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 유해를 사할린에 둘 수 없어요. 하지만 막상 하려고 생각하니 어려운 점이 너무 많네요. 사할린은 우리와 제도, 문화가 너무 다릅니다. 그곳에는 화장 문화가 없다고 합니다. 현지에서 아버지 유해를 화장할 수 없을 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모셔올지 난감합니다. 비용, 절차 등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묘소를 찾기까지 고생이 많았죠.
“2000년대 초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사할린 1세대 한국인들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유해라도 찾아 한국으로 돌아와야겠다고 결심했죠. 이리저리 알아보다 2006년 경기도 안산시 고향마을이라는 곳에 사할린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어르신 10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곳에서 아버지를 안다는 분들을 만날 수는 있었지만 아버지가 묻힌 곳을 아는 분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한 아주머니가 자신의 남편과 아버지가 친한 사이였으니 2007년 8월 15일 남편의 산소에 갈 때 같이 가서 찾아보자고 했습니다. 함께 갔지만 당시에는 찾지 못했죠.”
-아버지 묘소를 찾는데 국민일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서요.
“2010년 12월 어느 날 인터넷을 검색하다 2009년 11월 15일자 국민일보 기사를 찾아냈습니다. 사할린과 관련된 내용이었는데 기사에 참고용으로 쓰인 사진에 눈길이 갔어요. 사진 속 비석에는 아버지 이름이 씌어있고 양 옆에는 돌아가신 날짜와 아들인 내 이름이 적혀있었습니다. 국민일보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아버지 묘소를 찾지 못했겠죠.”
-아버지 묘소를 직접 찾아가보니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국민일보를 통해 아버지 묘소를 찾았다는 사연이 알려지면서 시민단체들은 물론 현지 사할린교민회도 공동묘지를 찾는데 도움을 줬습니다. 드디어 2011년 8월 15일 사할린 코르사코프 공동묘지에서 아버지의 비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비석을 끌어안았죠. 마치 아버지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날 어머니와 저는 목 놓아 울었습니다.”
-아버지는 언제 사할린으로 끌려갔나요.
“1945년 2월 23살 때 끌려가셨죠. 해방을 6개월 앞둔 시점입니다. 제가 2살 때, 어머니가 20살 때입니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1950년 6·25전쟁이 나기 전까지 사할린에서 아버지로부터 간간이 편지가 왔었다고 합니다. 전쟁 때 집이 불타면서 편지는 모두 재가 됐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가 보내신 편지 2통의 내용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계십니다.”
-아버지 없이 가족이 어려움을 많이 겪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혼인 후 선산이 있는 전북 완주군 대둔산 골짜기에서 살았습니다. 저도 거시서 태어났고요. 그러다 어버지가 징용 당했죠. 아버지는 안계셨지만 땅도 있고 농사도 지을 수 있어 그나마 괜찮았다고 합니다. 문제는 전쟁이었죠.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집도 잃고 피난민 신세가 됐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 작은 아버지, 저 네 식구가 친척 집을 전전했죠. 그러다 충남 논산 인근 마을에 정착해 산에서 풀도 뜯고 해서 겨우 먹고 살았습니다.”
-아버지와 2살 때 헤어졌는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까.
“1976년 초쯤입니다. 당시 저는 30대 초반으로 서울에서 가정을 꾸리고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엽서 한 장이 왔습니다. 대구에서 ‘화태(사할린)억류교포귀환촉진회’가 전에 살던 논산 집 주소로 보낸 것이었는데 용케 저한테 왔더군요. 엽서에는 “아버지로부터 편지가 와있으니 아는 사람은 가족에게 연락해 알려주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대구로 내려가 작은아버지 앞으로 온 아버지 편지를 찾았는데 거기에 “잘 지내고 있고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30년간 혼자 살았다”고 적혀있었습니다. 나 역시 “어머니도 아버지처럼 저를 키우며 혼자 사셨고 나도 이제 가정을 꾸려 잘 살고 있다”고 답장을 보냈죠. 그해 6월 아버지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아버지와 처음 연결된 순간이었죠.
-아버지의 죽음을 안 것은 언제입니까.
“아버지에게 답장을 받고 난 후 어머니와 처, 아이들과 같이 찍은 가족사진과 편지를 몇 번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1977년 3월 아버지의 친구라는 분으로부터 편지가 왔죠. 아버지가 1월 4일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겨우 편지로나마 만난 아버지가 몇 개월 만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때는 정말 가슴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유해봉환이 성사되면 어디에 모실 생각이죠.
“충남 천안에 있는 ‘망향의 동산’에 모실 생각입니다. 망향의 동산은 아버지처럼 강제로 외국으로 끌려간 피해자들을 위해 국가가 만든 공동묘지입니다. 원래는 선산이 있는 대둔산 인근으로 모실 생각이었지만 가족들과 상의한 결과 이곳에 모시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최일영 기자 mc10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