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6.7%가 술·게임·마약·도박 중독인데… 법은 국회에서 낮잠

국민의 6.7%가 술·게임·마약·도박 중독인데… 법은 국회에서 낮잠

기사승인 2013-09-05 00:05:01

[쿠키 사회] 대한민국은 중독 사회다. 알코올, 인터넷 게임, 마약, 도박 등 이른바 ‘4대 중독자’가 333만여명에 달하지만 정부와 국회는 손을 놓고 있다. 중독에 대한 범정부 통합관리 체계 구축을 골자로 한 ‘중독관리법’이 국회에 제출돼 있지만 게임업계 반발과 부처 이견 등에 부딪혀 낮잠을 자고 있다. 4대 중독 문제의 종합적 대응과 해결을 현 정부 국정과제로 추진 중인 보건복지부는 부처간 칸막이에 막혀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있다.

복지부는 지난 3월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4대 중독 종합대책 마련(5월), 중독관리법 국회 제출(7월), 범부처 중독대책 논의기구(가칭 4대중독대책위원회) 설치 등을 밝혔다. 4대 중독 및 폐해 관리 업무가 여러 부처에 산재돼 있고, 부처간 협력체계가 미비해 통합적 대처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 입법안은 따로 만들지 않았다. 대신 새누리당 신의진 의원이 ‘중독 예방·관리 및 치료를 위한 법률안’을 발의하자 이를 지켜본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 법안은 4일 현재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 계류 중이지만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중독관리법은 총리실 산하에 국가중독관리위원회를 두고 5년마다 중독 예방·치료 기본계획 수립, 중독폐해 실태조사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국회도 문제다. 하지만 업계의 반발과 부처 내 이견으로 정부 내 의견조율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다. 게임업계는 “신성장동력인 게임산업을 위축시킬 수 있다”며 반발했고, 이에 편승한 문화체육관광부도 “객관적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며 게임을 중독 대상에서 ‘삭제’할 것을 요청했다. 신의진 의원실은 “법 발의 후 입법공청회를 개최하려 했지만 문체부가 소극적이었던 데다 게임업계의 불참으로 열지 못했다”고 말했다. 주류나 사행산업계도 경제 위축을 이유로 노골적 반대의사를 밝히고 있다.

이러다보니 기초연금 도입 등 다른 국정과제들과 달리 4대 중독 대책은 지지부진하다. 게다가 최근 알코올 중독 전문치료기관인 카프 병원이 폐쇄되면서 정부가 중독의 해악을 방치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중독의 늪서 ‘SOS’ 봇물… 예방·재활 시스템 태부족

#사례1 지난 5월 경남 창원에서 하루 20시간 넘게 인터넷 게임에 빠져 살던 A씨(23)가 즐기던 게임을 만류하고 방해한다며 아내와 어린 자녀에게 폭력을 행사하다 경찰에 구속됐다. 그는 경찰에서 “도저히 내 의지만으론 게임을 끊을 수 없었다. 하지 못하게 해줘 고맙다”고 말해 주변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지난해 10월 고교 3년생 B군(18)은 수능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하루 종일 게임만 했다. 엄마가 야단치자 온갖 욕설을 퍼붓고 주먹을 휘둘렀다. 놀란 엄마는 맨발로 집밖 공중전화로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다.

#사례2 직장인 C씨(28)는 스무 살 때부터 강원랜드를 들락거리며 카지노 도박에 빠지는 바람에 1000만원가량의 사채 빚을 지게 됐다. 39%나 되는 고리에 시달리며 겨우 이자만 갚고 있지만 한번만 성공하면 하루아침에 빚을 다 갚을 수 있다는 생각에 연봉의 절반이 넘는 2000만원을 또다시 도박에 탕진했다.

#사례3 5년 전 알코올중독 진단을 받은 D씨(33)는 경기도 일산의 알코올치료기관 카프병원에서 두 차례 치료와 재활을 받으며 한동안 술을 끊었다. 하지만 올해 5월 카프병원이 문을 닫으면서 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아들이 예전처럼 돌아갈까봐 조마조마하다”는 D씨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 상황을 나 몰라라 하는 국가에 화가 난다”며 울분을 토로했다.

◇4대 중독자 333만명…전 인구의 6.7%=중독은 물질(알코올, 마약 등)이나 행위(인터넷 게임, 도박 등)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내성, 금단증상, 일상생활 지장 등 정신·행동 문제가 나타나는 경우를 말한다. 4일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국내에서 의학적 치료가 필요한 이른바 ‘4대 중독’ 환자는 알코올 218만명, 도박 59만명, 인터넷 게임 47만명, 마약 9만명 등 약 333만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5000만명)의 6.7%에 해당된다. 이 가운데 입원 및 재활치료가 필요한 만성중독군은 알코올 22만명, 인터넷 5만명, 도박 6만명, 마약 1만명 등 34만명으로 추정된다.

전북대 사회복지학과 윤명숙 교수는 최근 중독포럼 주최로 열린 세미나(‘탈중독사회로 이행을 위한 첫걸음’)에서 “중독물질(행위) 이용으로 관련 문제를 경험하고 있거나 경험할 위험이 높은 (고)위험군의 경우 알코올 1110만명, 도박 200만명, 인터넷게임 182만명에 달해 중독자들은 앞으로 계속 양산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윤 교수는 “특히 게임중독은 스마트폰의 급속 확산에 따라 청소년이나 영·유아 등 새로운 중독군이 급속히 늘고 있는 추세”라고 덧붙였다. 마약류의 경우 정확한 조사 자료는 없지만, 관련 당국은 중독 위험이 큰 상습 투약자를 30만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의학계에선 다양한 형태의 중독이 개인적 성향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질병으로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심각한 뇌질환으로 보고 있다. 쾌락을 느끼게 하는 신경전달물질 도파민이 관련되는 ‘뇌보상회로’가 활성화돼 중독에 빠지게 된다는 것.

가톨릭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김대진 교수는 “특히 게임, 도박 같은 행위중독도 알코올이나 마약처럼 ‘뇌보상회로’의 자극을 통해 기쁨이 유발되고 이를 통해 중독이 된다는 병리 메커니즘이 동일하다는 보고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면서 “이에 따라 최근 미국 진단통계 편람 5판(DSM-5)은 행위 중독과 물질 중독을 ‘중독’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포함해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독은 우울증 등 개인건강 문제뿐 아니라 자살이나 각종 범죄, 생산성 저하 등 중독자 가족과 사회 전반에 심각한 폐해를 초래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중독사회 된 이유=전문가들은 우선 4대 중독에 대한 용이한 접근성과 취약한 예방 치료 시스템을 꼽는다. 그나마 마약의 경우 형사처벌을 통해 억제하고는 있지만 알코올과 도박, 인터넷 게임 등에 대해서는 접근성을 제한할 정책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누구나 자연스럽게 중독에 이르게 된다는 지적이다. 알코올은 주류 판매 시간과 장소에 대한 규제가 없어 무분별한 접근이 가능하다. 각종 합법(카지노, 경마 등), 불법 사행산업의 번성으로 쉽게 도박의 유혹에 빠지는 서민들도 늘고 있다. 서울 용산구 화상경마장 입점 저지 주민대책위 이원영 공동대표는 “화상경마장 출입 인구의 80%가 심각한 도박중독증에 빠진다는 연구결과를 볼 때, 화상경마도박장이 들어서면 서울 시민의 삶이 황폐화될 위험이 크다”고 우려했다.

인터넷게임의 경우에도 청소년의 심야 게임시간을 제한하는 셧다운제가 시행되고 있으나 스마트폰 게임은 제외되는 등 범위가 제한적이고 실효성에 한계가 있다. 김민선 아이건강시민연대 사무국장은 “또 청소년 PC방 출입 시간은 오후 10시로 제한돼 있으나 사용 내용에 대한 규제는 없고 위반 시 처벌도 미약하다”고 말했다.

예방·치료서비스 기관이 드물고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다. 2010년 기준 알코올 중독으로 치료받은 환자 수는 10만433명으로 추정 환자(당시 155만명) 중 6.5%에 불과했다. 또 전국 알코올상담센터가 설치돼 있지만 2011년 치료받은 사람은 5521명으로 전체 추정 환자의 0.3% 선에 그쳤다.

마약 중독은 치료보호 전담부서인 복지부와 사법부의 협력체계가 취약해 마약퇴치운동본부에 위탁한 교정시설·보호관찰소(수강명령) 프로그램, 기소유예 조건부 재활교육 프로그램 정도에 의존하고 있다. 2011년 치료보호 실적이 81명에 그치는 등 제도 활용이 미흡하다. 도박중독의 경우 2011년 의료기관의 치료서비스를 받은 사람이 706명에 불과했다. 인터넷 게임 중독도 일부 심리검사 지원 이외 의료기관 연계서비스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특히 성인 게임중독에 대해서는 지역사회 혹은 병원에서 어떤 치료적 개입이 이뤄지는지 파악조차 쉽지 않은 실정이다.

중독자 예방·치료 여러 부처 분산… 컨트롤타워가 없다

중독 예방·치료 업무는 여러 부처에 분산된 채 컨트롤타워가 없는 게 현재 우리나라의 실정이다. 알코올은 보건복지부가, 마약은 법무부·식품의약품안전처·복지부가, 도박은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문화체육관광부·농림수산식품부·기획재정부가, 인터넷 게임은 문광부·미래창조과학부·교육부·여성부·복지부 등이 함께 관할하고 있다.

중독은 복지부가 주도적으로 관리하고 담당해야 하는 문제인데도 알코올·마약을 제외하고는 개입 및 협력이 취약한 실정이다. 도박의 경우 아예 복지부의 참여 자체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일부 중독은 관련 산업의 인허가권과 진흥 업무 부처까지 관여하고 있어 정부 내 의견 통일이 쉽지 않은 실정이다. 중독 종류에 따라 관련 부처에서 개별적으로 예방 관리 및 치료 대책을 수립·시행하고 있으나 중독의 개념과 명칭, 서비스 제공 형태 등이 각기 달라 서비스 공백, 정책 중복, 부적절한 배치, 예산 낭비 등 비효율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전남대 윤명숙 교수는 “중독 예방·치료 사업의 안정적 관리를 위해선 부처별 사업, 정책 간 통합 조정 기능을 할 국가 컨트롤타워 구축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법조계에선 게임산업진흥법, 마약관리법 등 현행 법 체계가 ‘중독’ 자체에 대한 구체적 이해 없이 중독 관련 사회문제들을 형사 처벌과 단속의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마약이나 도박의 경우 행위 자체가 형사 처벌 대상인 반면 알코올이나 인터넷은 행위 자체는 널리 허용하되 범죄로 이어질 때만 제재를 한다는 것. 법무법인 LK파트너스 고한경 변호사는 “이는 범죄는 아닐지라도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영역에 대한 방임으로 볼 수 있다”면서 “중독을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범죄화되기 전에 예방적 관점에서 국가가 적극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를 정의하는 기본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른 나라들도 국가나 지방정부 차원의 통합적인 중독관리 체계를 운영하는 추세다. 미국 뉴욕주와 일리노이주 등은 ‘알코올 중독 및 약물남용’ 관련 부서를 두고 알코올, 약물(마약 등), 도박 중독을 통합 관리하고 있다. 호주는 2011년 연방정부 산하에 ‘주정부 연합 알코올 및 약물 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알코올, 담배, 마약, 의약품 남용 등 문제에 적극 대처하고 있다. 캐나다는 2002년부터 중독최고위원회(CECA)를 두고 지역 중독관리센터와 연계·협력하고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
김철오 기자
twmin@kmib.co.kr
김철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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