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사회] “세월호 4층 객실에 있던 아이들은 너무나 차분하게 구명조끼를 입고 대기하고 있었어요. ‘선실에 대기하라’는 방송만 믿은 것 같아요. 얼마나 착한 아이들인지, 배가 침몰하기 직전인데도 살려달라는 말조차 하지 않고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월호에서 구조된 김모(53)씨는 선실이 물 속에 잠기기 직전까지도 학생들이 밖으로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배가 완전히 기울면서 선장 등 선박직 직원들이 배를 버리고 탈출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인데도 학생들은 ‘선실 대기’ 방송만 믿고 따른 것이다.
김씨는 25일 국민일보 쿠키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사고가 난 날 4층 갑판에 매달려 있었는데 선실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10여m 떨어진 곳에서 학생들이 가지런히 구명조끼를 입고 동요도 하지 않은 채 한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며 “아이들은 ‘움직이면 더 위험하다. 안전한 선실에 대기하라’는 안내 방송만 철석같이 믿고 있었고, 심지어 살려달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3층 8인실 침대칸에 묵었던 김씨는 사고일 오전 8시15~20분쯤 아침밥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위험을 직감했다고 했다. 오전 8시50분쯤 식사를 마친 뒤 아내 임모(44)씨를 데리고 무작정 3층 갑판으로 나왔다. 아내 임씨는 위험하니 방으로 가자고 성화였지만 김씨는 무언가에 홀린 듯 아내 손을 놓지 않았다.
“배가 40~50도 기운 상황에 3층 갑판으로 나오니 조모(8)군만 난간에 부딪혀 울고 있더군요. 우리 세 사람만 빼고는 전부 선실에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나온 지 1분도 채 안 돼 배가 더욱 기울고 빙글 회전하면서 컨테이너가 떨어져 내려가더군요. 저는 조군과 아내를 끌고 무작정 더 높은 4층 갑판으로 올라갔습니다.”
4층 갑판으로 간신히 기어 올라왔지만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김씨는 그 때까지만 해도 선실로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도저히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결국 포기했다. 아내는 괜히 밖으로 나와서 우리만 죽게 됐다고 김씨를 원망했다. 조군에게 왜 혼자 갑판에 나왔냐고 물으니 조군은 ‘아빠를 찾으러 나왔다’고 대답했다.
그 때까지 구명조끼를 입지 못했던 김씨는 4층 선실로 가는 통로까지 간신히 기어가서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던져달라고 소리를 쳤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구명조끼라도 입으려 한 것이다. 착한 학생들은 김씨 부부와 조군을 위해 구명조끼 3개를 차례로 던져 줬다.
“갑판을 아등바등 기어 올라가 창문으로 아이들을 보니 구명조끼를 입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더군요. 마루바닥이 시멘트로 돼있고 배가 기울어져 있으니 일부 학생은 넘어져 있기도 하고 구석으로 구른 아이도 있었어요. 그래도 아이들은 동요하지 않고 안내방송만 충실히 따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이 나오니 아이들은 살려달라는 소리조차 치지 않았고요. 그 때까지만 해도 선실 안에 있으면 살고 갑판에 나와 있는 우리만 죽게 됐다고 생각했죠.”
김씨 부부는 그러나 배가 완전히 넘어가기 직전 달려온 해경선에게 구조됐다. 김씨 부부는 탈출 당시 충격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김씨는 “매일 밤마다 악몽을 꾸고 있다”며 “차가운 바다에 갇히면서도 안내 방송만 믿고 착하게 대기하던 아이들 모습을 생각하면 너무 괴롭고 힘들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준석(69) 선장이 퇴선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한 것과 관련해서는 “그런 명령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배를 탄 이후부터 단 한 차례도 안전과 관련된 전달사항을 접하지 못했다”며 “선장이 애초 승객들에게도 퇴선 명령을 내렸다는 말을 하는 걸 보고는 화가 났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