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권남영 기자] 상대방을 한 눈에 꿰뚫어볼 것 같은, 왠지 깐깐하고 톡 쏠 것 같은. 어렴풋이 그려지는 배우 윤여정(68)의 이미지는 그렇다. 솔직한 직설화법 때문인데 그 새침함이 매력이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가 사랑스러울 수 있는 이유다.
“물어보세요. 답해 드릴게. 빨리빨리.”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윤여정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다. 평소 인터뷰를 꺼리는 그이지만 이번엔 주연이니 별 수 없었다. 노년의 로맨스를 다룬 영화 ‘장수상회’에서 타이틀롤을 맡았다. 오랜만에 작품의 중심인물을 연기한 소감이 궁금했다.
“찍으면서는 나도 좋을 줄 알았어요. 근데 막상 끝내놓고 생각하니까 주인공이라는 건 책임감이 따르더라고. 난 주인공까진 아니니까 박근형 선생님이 책임져야하는 거지만(웃음). ‘손님이 드느냐 안 드느냐’ ‘흥하느냐 망하느냐’ 이런 게 다 (주연)책임으로 가잖아요. 좋지만은 않은 일이라는 걸 알았어요. 매번 뒤에서 뭐 고모·이모·할머니·엄마 역할하고 그럴 때 ‘아유, 대사만 많고 빛도 안 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해보니까 아니더라고.”
‘진짜 윤여정을 만났구나’ 실감이 났다. 영화 속 금님(윤여정)이 조금은 흐릿해지려 했다. 금님은 여리고 부끄러움이 많은 인물이다. “예쁩니다”라는 성칠(박근형)의 칭찬 한 마디에 얼굴을 붉히는 사랑스러운 여인이기도 하다. 이렇게 어여쁜 캐릭터를 소화하면서 어떤 특별한 고민을 했을까. 답변은 역시나 시원시원했다.
“예쁘지 않은 여자가 예쁜 척 하면 숭하죠. 그런 건 안했고 그냥 행동이나 외양에 신경을 썼어요. 뭐, 강제규 감독이 다 해준 거죠. 왜냐면 저는 꽃무늬 옷이나 분홍색 옷이나 그런 거 안 입거든요. 분홍색 옷을 평생에 처음 입어봤으니까. 강 감독이 그렇게 표현을 해준 거지 제가 연기로 어떻게 하겠어요. 수술하고 나갈 수도 없고.”
거침없는 대답에 현장엔 폭소가 터졌다. 그래도 영화에서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게 나왔다는 말을 건넸다. 윤여정은 “그래요?”라며 짐짓 안도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나 이내 “강 감독하고 나하고 (최대한) 사랑스럽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고 짧게 얘기하고는 음료로 목을 축였다.
극중 박근형(75)과의 합이 특히 돋보인다. 남다른 호흡엔 이유가 있었다. MBC 일일드라마 ‘장희빈’(1971)에서 이미 사랑했던 사이이기 때문이다. KBS 드라마 ‘꼭지’(2000), KBS 단막극 ‘유행가가 되리’(2005)에서도 호흡을 맞췄으나 이토록 절절한 사이로 만난 건 ‘장희빈’ 이후 처음이다. 윤여정은 “우리가 그렇게 어린 나이가 아니라서 그와 나의 흉허물을 다 안다”며 “서로 장단점을 다 아니까 단점을 피해가면서 연기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의 말처럼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니다. 어떤 장면을 어떻게 소화할까라는 등의 고민보다 조금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분량이 많은 촬영 일정이 가끔 버거웠다. 체력적인 한계도 자꾸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장수상회를 찍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냐’는 질문엔 늘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온다. 놀이공원 데이트 신이다.
윤여정은 “난 굉장히 실용주의”라면서 “연기로 힘든 건 잘 생각 안 나고 몸으로 힘든 게 중요한 여자”라고 입을 뗐다. 놀이기구를 4~5번 연달아 타니 힘에 부쳤단다. 그는 “중간에 못 멈춘다고 해서 계속 탔더니 속이 아주 메스꺼웠다”며 “그런데도 좋아하는 척을 하려니까 정말 고통스럽더라”고 토로했다.
“아주 힘들게 됐죠. 내가 그렇게 낭만적인 배우가 못 돼서 미안해요. 나는 어떤 신을 연기할 때 힘들고 어쩌고 그런 건 (얘기 안 해요). 직업이 배우인데 그런 거야 내 노력 여하에 달린 문제죠. 이거 저거 다 힘들어서 못하면 집에 가만히 있어야지 뭐. 근데 물리적으로 내 몸이 힘들거나 환경이 힘들거나 그런 건 몹시 (기억에) 남아요. 그러니까 미안해요. (답변이) 낭만적이지가 못해서.”
그럼 ‘가장 마음에 드는 신은 어느 장면이었나’라는 질문을 윤여정은 “없었어요”라며 단칼에 잘랐다. 자기 연기에 늘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항상 출연한 작품을 보면 자신의 부족함만 눈에 띈단다. 본인 연기에 스스로 만족한 적은 없다는 게 그의 말이다.
“자기가 (연기)하는 거 보고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들고 즐기고 그럴 순 없죠. 나는 못 그래요. 나는 TV 모니터할 때에도 나 나오는 거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보지 누구하고든 같이 못 봐요. 자기 한 거 보면서 막 도취돼서 그런 사람도 있대요? 별나다. 나는 없던데. ‘저기서 조금 어떻게 할 걸 그러지 않았나’ 항상 그런 것만 보이죠. ‘저기 정말 잘했네’ 그럼 좋겠다. 그런 경험이 난 진짜 없는데?”
50년 경력의 베테랑이 이런 생각을 하기 쉬울까. 윤여정은 누구보다 자신에게 날카롭고 냉철했다. 오랜 시간 배우로 살아오면서 매너리즘에 빠진 적이 있느냐고 묻자 “빠진다. 누구나 그렇다”는 대답이 바로 나온다.
그는 “나는 몰라도 사람들은 안다”면서 “‘저 배우 연기 매너리즘에 빠진 거 같아’라고 평하진 않지만 어딘지 식상해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이어 “그럴 때 ‘저 여자는 피부가 왜 저래. 코가 왜 저래’라는 등의 단점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 같더라”며 “사람들이 연기를 보면서 몰입이 안 되니 단점이 보이고 뭔가가 못마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래 하다보면 나는 똑같은 몸에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얼굴로 이것저것을 해야 되잖아요. 더군다나 TV(드라마)할 때는 일주일에 몇 번 똑같은 사람이 나가서 똑같을 걸 하고 있고. 어떻게 그 사람이 신선하겠어요. 당연한 일이죠.”
이는 “배우의 영원한 과제”라고 윤여정은 말했다. 애쓰고 있지만 극복됐는지는 아직 모른단다. 늘 새로운 역할에 도전하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배우는 장애물 경기 같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뭐 하나를 넘으면 또 있어요. 그걸 또 넘어야 돼요. 어떤 새로운 역할이 왔을 때 내가 도전하고, 그걸 넘기고 나면 그 비슷한 역할이 섭외가 오죠. 근데 그걸 또 하면 식상해지는 거죠. 난 그걸 안하려고 애를 써요.”
그래서 선택한 차기작은 ‘계춘할망’이다. 생활력 강하고 억척스런 제주도 해녀 할머니로 분한다. “너무 다른 역할이기 때문에 한번 해보려고 한다”는 게 그의 말이다. 새로운 모습이 벌써부터 궁금해지지만, 그 얘긴 다음 기회로 미뤄야할 것 같다.
“이제 되지 않았수? 다 얘기해줬잖아 내가. 나 같이 빨리빨리 대답하는 배우가 어딨어. 좋지 않우? 빨리빨리 대답하고 다 가르쳐주고 그러니까?” kwonny@kmib.co.kr, 사진=박효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