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은 썼습니다. 그러나 민심은 달았습니다. 정권교체에는 실패했지만, 국민의 마음은 굳게 모였습니다. 미래를 약속해주는 국민의 눈동자는 빛났습니다”
큰 덩치에 푸근한 인상, 재치 있는 입담까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개그맨 정준하(44)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반면 그와 비슷한 이름을 가졌던 역사적 인물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요.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정치가였던 고(故) 장준하(1918∼1975) 선생 이야기입니다.
장 선생은 1918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일본동학대학 철학과, 동경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이후 1944년에 일본군학도병에 입대했다가 6개월 만에 탈영하고 한국광복군 훈련반에 입대해 광복군과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펼쳤죠. 1945년에는 귀국해 김구 주석의 비서로 지내기도 했습니다.
1948년 출판사 한길사를 설립해 문화사업을 전개하며 1952년 월간 ‘사상’ 이듬해 ‘사상계’를 창간해 자유 민주 반독재 투쟁에 헌신했습니다.
1967년 대통령 선거 기간 중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된 장 선생은 옥중에서 서울 동대문 을구에서 압도적 지지로 당선돼 제7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 민주회복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고 범민주세력의 통합에 힘쓰는 등 박정희 정권에 맞섰으며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하다 1974년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이듬해인 1975년 8월17일 경기 포천군 소재 약사봉 인근에서 의문사했습니다.
장 선생의 생전 굴곡졌던 인생은 사후에도 계속됩니다.
정부는 사인을 실족사로 발표했으나 여러 가지 의문점으로 타살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1993년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장준하 선생 사인규명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타살을 주장하며 국정조사를 추진했지만 무산됐죠.
십수 년이 흐른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사망경위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지만, 당시 초동수사와 변사기록의 부족, 일부 폐기된 점 등을 이유로 ‘진상규명불능’ 판정을 내렸습니다.
이후 2011년 8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장준하 선생 묘소 옹벽이 폭우로 무너져 이장을 진행하던 중 두개골의 함몰 골절이 발견되자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조사 공동위원회’가 꾸려졌습니다. 이에 2013년 정밀감식을 진행한 법의학 전문가 이정빈 서울대 명예교수는 “추락사라고 보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며 “머리 부분에 가격을 당해 숨진 뒤, 추락해 엉덩이 뼈가 골절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해 논란은 계속됐습니다.
새삼스럽게 한 인물의 일생을 구구절절하게 써 놓은 이유는, 17일인 오늘이 고 장준하 선생의 40주기 추모식이 열린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입니다. 일제와 독재에 항거한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상이 이런 날에 인터넷 검색어조차 되지 못할 정도로 젊은이들에겐 잊혀진 인물이 돼 가고 있습니다.
장 선생은 생전 ‘못난 조상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최소한 “장준하가 누구야?”라고 묻는 ‘못난 후손’은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독재는 신념의 힘을 꺾지 못한다’는 헬렌 켈러의 말처럼 오늘 하루만큼은 신념을 위해 뜻을 굽히지 않았던 장준하 선생을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요?
민수미 기자 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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