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 떠나는 20대 여성들 [쿠키청년기자단]

‘한국이 싫어서’ 떠나는 20대 여성들 [쿠키청년기자단]

기사승인 2024-11-17 15:49:22
영화 ‘한국이 싫어서’ 스틸컷. 디스테이션

‘나는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소설 ‘한국이 싫어서’ 중)

윤가은(20·여·가명)씨는 얼마 전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읽었다. ‘한국이 싫어서’는 장강명 작가가 2015년 집필한 소설이다. 지난 8월 영화로도 개봉됐다. 작품은 한국이 싫어서 뉴질랜드로 떠나려는 20대 여성 ‘계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불안정한 미래와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 외국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줄거리는 많은 청년의 공감을 샀다. 윤씨도 그중 한 명이다. 

윤씨는 현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호주 ‘워홀’을 준비하고 있다. 워홀이란 워킹홀리데이의 줄임말로, 관광 취업이라고도 한다. 주로 20~30대가 해외 경험을 위해 외국에서 생활하며 여행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한다. 국가에 따라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4년까지 체류할 수 있다. 윤씨는 호주로 1년간 워홀을 다녀온 뒤 유학까지 할 계획이다. 윤씨가 이런 결심을 한 이유는 ‘나는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윤씨는 “누군가와 경쟁하는 것도 싫고, 뭔가를 남들보다 뛰어나게 잘할 자신도 없다”며 “이런 성격으로는 한국에서 살아남기 힘들 것 같다고 느꼈다”고 밝혔다. 윤씨가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치열한 경쟁과 완벽주의를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윤씨는 학창 시절 내내 심한 압박을 느꼈다. 늦어도 20대 중반에는 명문대를 나와 좋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주변인들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윤씨는 자신이 경쟁에서 뒤처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심한 우울과 불안에 시달렸다. 그들이 요구하는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순간 ‘실패한 인생’을 살게 될 것 같았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러나 ‘효율을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며칠 만에 잘렸다. 윤씨는 “‘일을 배우는 단계에서조차 미숙하면 안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고작 아르바이트에서 잘린 것뿐이지만 큰 회의감이 들었다”고 밝혔다. 부모님과 친구들은 그런 윤씨를 이해하지 못했다. 윤씨는 “주변에 나를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힘들고 외로웠다”고 털어놨다. 

그런 외로움이 오히려 윤씨의 이민 결심을 굳건하게 만들었다. 자신을 믿지 못하거나 자신의 선택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윤씨는 “높은 임금과 여유로운 사회 분위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환경이 맘에 들었다”며 “호주에선 남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삶을 개척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영화 ‘한국이 싫어서’ 예고편. 엔케이컨텐츠

한국을 떠나려는 이유가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이들도 있다. 바로 ‘탈조’하려는 20대 여성들이다. 살기 힘든 조선(대한민국)에서 탈출한다는 의미의 탈조선은 20대 여성들 사이에서 ‘탈조’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여성들이 탈조하려는 이유는 복잡하면서도 간단하다. 한국의 여성들이 겪는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지만, 이를 다루는 사회의 분위기는 차갑기 때문이다. 

건축사를 꿈꾸는 테이(20·여·가명)씨는 “남녀 임금 격차와 채용 차별을 겪기 싫어 떠났다”고 밝혔다. 지난 3월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는 31.2%였다. OECD 국가 중 가장 높았으며, 평균의 2.6배에 달했다. 여성에 대한 채용 차별도 여전했다. 지난 2월 노동인권단체 직장갑질119의 발표에 따르면 여성 직장인의 30%가 모집·채용, 교육·배치·승진 등에서 차별을 겪은 것으로 조사됐다. 테이씨는 “제 전공인 건축계는 특히 남성중심적인 분위기가 심하다”며 “소수의 여성 건축가가 있긴 하지만 절대다수는 여전히 남성들”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런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커리어를 쌓고싶어 유학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테이씨는 얼마 전 자신의 SNS에 ‘한국이 싫은 진짜 이유’라는 게시물을 올렸다. 테이씨는 게시물을 통해 △여성 채용 차별 △외모 집착과 코르셋 강요 △N번방, 딥페이크 같은 성범죄 △스타벅스보다 많은 서울 룸살롱 △한국 사회의 페미니즘 혐오 등 한국이 싫은 이유를 나열했다. 실제로 지난 2020년 ‘코로나19 유흥시설 집합금지 명령’을 통해 알려진 서울 룸살롱의 수는 1,968개로, 같은 시기 스타벅스 매장 수보다 200여개 더 많다. 해당 글은 1만 5,000회가 넘게 공유되며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샀다.

영화 ‘한국이 싫어서’ 스틸컷. 디스테이션

김윤진(29·여·가명)씨도 한국의 여성문제에 지쳐 이민을 결심했다. 김씨는 고등학교 교사였으나, 워홀 준비를 위해 직장을 그만뒀다. 김씨는 지난 2019년 남자고등학교 근무 중 학생에게 성범죄를 당했다.

김씨가 근무하던 학교의 남학생들은 이전에도 몇 차례 여성 교사를 상대로 성희롱을 했다. 그러나 학교 측은 큰 일이 아니라며 넘겨왔다. 김씨의 사건 이후 징계위원회가 열렸고, 가해자는 퇴학당했다. 그러나 피해자인 김씨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2차 가해에 시달려야 했다. 우울증과 불면증을 앓던 김씨는 결국 학교를 옮겼다.

시간이 흐른 후에도 김씨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소식은 끊이지 않았다. 여성 교사를 겨냥한 폭행 사건이나 불법 촬영 사건이 꾸준히 들려왔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이 살해당했다는 뉴스를 매일 같이 봐야 했다. 결국 김씨는 여성을 직·간접적으로 위협하는 이 사회에서는 도무지 건강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김씨는 “호주에도 당연히 성범죄가 있을 것”이라며 “그러나 성범죄를 심각하게 인지하는 정도가 한국과 크게 다르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호주에서 동양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힘들긴 하겠지만, 여성으로서의 위협은 덜 당한다는 점이 저의 선택을 도왔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현재 워홀 자금을 마련한 후 영어 공부에 전념하고 있다. 김씨의 남성 지인들은 ‘여자가 워홀을 다녀오면 평판이 안 좋아진다’며 김씨를 말렸다. 그러나 김씨는 바로 그런 반응이 자신이 한국을 떠나고 싶은 이유 중 하나라고 꼬집었다. 김씨는 “여성들이 한국에서든 타국에서든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하며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길 바란다”고 밝혔다. 
최세희 쿠키청년기자
darang1220@naver.com
최세희 쿠키청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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