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조현우 기자] 선거 개표방송 못지않은 밤샘드라마가 펼쳐졌습니다. 47년 만에 필리버스터가 부활했습니다. 인터넷에선 블록버스터급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23일 북한 핵실험 등으로 조성된 최근 한반도 긴장을 ‘전시·사변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로 규정하며 국가정보원에 테러 용의자 감청·계좌추적 등을 허용하는 테러방지법안을 직권상정했습니다. 야당은 법안 표결을 저지하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서 필리버스터를 벌이고 있습니다.
필리버스터는 합법적 수단으로 국회 의사진행을 지연시키는 무제한 토론을 뜻합니다. 다수당 횡포를 막자는 취지의 제도입니다. 제헌 국회 때 만들어졌다가 1973년 박정희 정권 당시 시간제한 조항으로 사라졌다 2012년 국회선진화법을 만들 때 39년 만에 부활했습니다. 의원 1인당 1회씩 토론할 수 있고, 의원 스스로 토론을 멈추거나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의 종결 요구가 없는 한 회기 동안 계속 진행할 수 있습니다. 무제한 토론이 끝나면 해당 안건을 지체 없이 표결해야 합니다.
이번 필리버스터는 1969년 박한상 신민당 의원이 법제사법위원회에서 3선 개헌안을 저지하려고 10시간15분 동안 반대토론을 벌인지 47년 만입니다.
첫 주자는 김광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나섰습니다. 저녁 7시5분부터 필리버스터를 시작한 김 의원은 24일 새벽 0시40분에 단상에서 내려왔습니다. 5시간35분, 1964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본회의 5시간19분 기록을 뛰어넘었습니다. 두 번째 주자는 최근 더민주를 탈당, 국민의당으로 건너간 문병호 의원. 문 의원은 1시간49분 토론을 마쳤습니다. 세 번째 바통은 은수미 더민주 의원이 새벽 2시30분부터 이어받았습니다. 그리고 24일 현재 무려 8시간이 넘도록 필리버스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필리버스터가 시작되자 새누리당 의원 대부분이 빠져나갔고, 본회의장에는 야당 의원 30여 명만이 남았습니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회의장 밖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더민주가 필리버스터를 악용해 법안을 발목 잡고 있다. 의사진행 방해 절차를 중단하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새누리당은 야당 의원들의 발언이 이어지는 동안 몇몇 의원만이 본회의장에 남아 ‘보초’를 섰습니다.
더민주의 필리버스터는 이종걸 원내대표의 제안으로 이뤄졌습니다. 정 의장의 테러방지법 직권 상정 방침을 접한 뒤 원내 지도부 회의에서 “필리버스터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고 합니다. 의원총회에선 “무제한 신청하면 회기가 끝나는 3월 11일까지 계속할 수 있다. 우리 당 100명이 15일간 하려면 한 사람당 5시간 정도 하면 된다”는 구체적인 지침까지 나왔습니다. 더민주 이춘석 원내수석부대표는 “필리버스터는 더 이상 희망하는 사람이 없거나 지쳐서 못할 때까지 한다”며 “기간을 정해놓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새누리당은 곤혹스러운 표정입니다. 원유철 원내대표는 “40년만에 도입된 필리버스터 제도의 첫 작품이 바로 국민의 안전을 위한, 또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테러방지법 저지라고 한다”면서 “경악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무박 2일의 필리버스터에 24일 오전까지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는 개표방송을 방불케하는 열기를 보였습니다. ‘김광진 힘내라’가 포털사이트 실시간검색어 1위에 올랐고, 은수미 의원에 대한 격려가 쏟아졌습니다. 생중계 사이트를 문의하는 게시물도 잇따랐습니다. ‘최근 들어 야당이 제일 잘한 일’ ‘체력과 집중력이 대단하다’ ‘최악의 국회라는 말 취소’ ‘끝까지 지켜보겠다’ ‘고생한 의원들 대체공휴일 줘라’ 등 지지 반응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여권 성향 지지자들 사이에선 ‘필리버스터에 갇혔다’ ‘지금 테러가 일어날 수도 있는데 너무 한가하다’ ‘지나친 발목잡기 아닌가’ 등의 비판이 나왔습니다. 테러방지법 본연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시간 경신에만 너무 포커스가 맞춰졌다는 이야기도 보입니다. 같은 당 문병호 의원의 필리버스터에도 불구하고 “테러방지법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여당과 막아서는 야당의 모습은 19대 국회 내내 국민을 실망시키는 무능함 그 자체”라고 여야를 싸잡아 비판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거론하는 게시물도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