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유럽 한달] 13. 호르겐- 750주년 기념 동네 축제에 가다

[무작정 유럽 한달] 13. 호르겐- 750주년 기념 동네 축제에 가다

기사승인 2016-03-30 11:12:55

"[쿠키뉴스] 스위스 친구 사비나가 살고 있는 호르겐은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입니다. 취리히와 꽤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관광객이 찾는 일도 드물어요. 하지만 호르겐은 13세기경부터 스위스의 남과 북을 잇는 교통 요충지여서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 곳이라고 합니다. 내세울 만한 관광 명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취리히 호수를 끼고 있어 한적하고 운치 있는 곳입니다.

호르겐 이란 도시에 호기심이 생겼던 건 6년 전 캐나다 배낭여행자 투어에서 사비나가 얘기해준 순례길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일본의 시코쿠 순례길(1200~1400km)나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150~200km)에 관심이 많았고 캐나다에도 세계적인 하이킹 코스인 웨스트 코스트 트레일(West Coast Trail)을 가볼 수 있는지 열심히 알아보러 다닐 때였습니다. 웨스트 코스트 트레일은 캐나다 서쪽의 밴쿠버 아일랜드의 하이킹 코스로 해안가를 따라 난 절벽과 산길을 따라 77km를 걷는 코스입니다. 25층 높이의 계단도 있고 허리까지 물이 차는 강도 여러 번 건너야 할 만큼 어려운 코스지만 아름다운 절경에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하지만 1년 에 딱 5개월 동안만 개방하고 입장 인원도 하루 52명으로 제한하기 때문에 쉽게 가볼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로키산맥 투어를 함께 하면서 알게 된 사비나는 바닥이 미끄러운 운동화를 신고도 눈이 쌓인 설산을 다람쥐처럼 뛰다니는 활기찬 친구였습니다. 오래 전 록키산맥을 개척해 기차길을 놓을 때도 스위스 사람들을 고용했다는 사실을 아냐며 스위스인에게 이 정도 눈덮인 산따위는 껌이라며 활보하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죠. 집 근처 뒷산에 8천미터 급 산이라니 이런 체력의 친구라면 웨스트 코스트 트레일도 함께 갈 수 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를 했었죠. 하지만 사비나는 어학연수를 마치고 캐나다를 떠나려던 참이었고 대신 스위스 집 근처에 이탈리아까지 이어지는 길이 있으니 그곳으로 오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우리 동네 근처에 산을 넘어서 이탈리아까지 이어진 길이 있어. 사람들이 종종 그 길을 따라 걷는데 산길을 걷다가 집이 나타나면 똑똑 문을 두드리는 거야. 그럼 먹을 것을 나눠주기도 하고 잠자리도 주는 경우도 있어. 그러니 웨스트코스트 트레일 처럼 아주 큰 배낭은 필요없지. 스위스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하거든"

이 얘기를 들은 다음에는 사비나가 사는 동네를 떠올리면 풍경 하나가 머릿속에 그려지곤 했습니다. 먼 산길을 걷다 어둑어둑 해가 질 때쯤, 굴뚝에서 연기를 내뿜고 있는 아담한 집 한 채가 눈앞에 나타나는 겁니다. 가까이 다가가 노크를 하면 노부부가 인자한 미소로 순례자를 맞아주는 그런 풍경이요.
하지만 그 순례길은 시코쿠나 산티아고처럼 유명하지 않는지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정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대신 호르겐이란 도시를 지나는 하이킹 코스 중에서 옛날 노새 상인들이 독일에서 출발해 이탈리아까지 걸어간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순례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세 나라를 거쳐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며 걷는 상상을 하니 가슴이 몹시 설렜습니다. 바로 그 동네, 호르겐에 와있는 것입니다.

"오늘 밤엔 옆동네엘 가자! 거기서 오늘 축제가 열린데!"

혼자서 사비나를 처음 만났던 때와 호르겐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며 망중한에 빠져있는데 사비나가 흥분 된 목소리로 말을 꺼냅니다. 작은 동네에서 열리는 소박한 축제일 테지만 멀리 한국에서 온 친구들에게 작은 이벤트라도 선사할 수 있어 기뻐하는 눈치입니다.

기차를 타고 금새 도착한 리히터스빌(Richterswil)은 무척 아담한 동네였는데 1265년에 만들어 졌다고 하니 벌써 75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곳이었습니다. 750주년을 기념하며 열린 축제에는 도시 곳곳마다 음악과 거리 음식들, 그리고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도 북적거렸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놀이기구들도 여기 저기 설치되어 있고 행사장 천막 안에는 밴드가 신나는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잔치하면 먹는 걸 빼놓을 수 없죠? 스위스에서 가장 유명한 게 뭐냐고 물었더니 사비나와 카린은 치즈와 소시지라고 하는 군요. 역시나 행사장까지 가는 마을 거리에서도 간이 바비큐 통을 들고 나와 직접 만든 소시지를 노릇노릇 먹음직스럽게 굽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안 먹어 볼 수가 없겠죠! 숯불 위에서 잘 구워진 소시지를 한 입 먹어보니 뽀독한 껍질이 톡 터지면서 육즙이 가득 베어 나옵니다.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네요.

스위스의 전통음식이라고 하는 라클렛(Raclette)을 파는 곳이 있어 라클렛도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스위스 산악지방에서 주로 많이 먹는 음식이라고 하는 데요. 원래는 덩어리 치즈를 녹여 감자와 피클과 곁들여 먹는 음식입니다. 축제장에서는 대량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 길쭉한 사각형 모양의 라클렛 전용 틀이 있더라고요. 감자 위에 진한 맛의 스위스 치즈를 잔뜩 얹은 라클렛을 먹어보니 진짜 스위스에 온 실감이 나더군요.

라클렛을 다 먹고 일어서는데 사비나가 초콜렛을 파는 좌판을 가리키며 "저건 꼭 사야 해!" 라며 뛰어갑니다. 바로 마겐브로트(Magenbrot)라고 하는 독일과 스위스에서 먹는 과자인데요. 주로 축제나 크리스마스 시즌에 파는 과자에요. 이름을 직역하면 '위장 빵(Stomach bread)'이라는 뜻인데 정향, 계피, 팔각, 육두구, 생강 등 소화에 도움이 되는 향신료를 넣어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해요. 딱딱하고 묵직한 느낌의 과자인데 조금 축축하기도 해서 빵에 가까운 느낌이었어요. 마겐브로트를 먹으면서 호르겐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올라탑니다. 축제 때만 먹는 거라고 하니 바로 요 때 호르겐을 방문한 우리는 얼마나 운이 좋은지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글·사진 | 이선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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