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亡)] ‘잘 먹는 소녀들’이 보여주는 여성인권… 음험하기 그지없다

[망(亡)] ‘잘 먹는 소녀들’이 보여주는 여성인권… 음험하기 그지없다

기사승인 2016-06-16 16:04:58

우리는 숱하게 ‘잘 먹는’ 여자 연예인들을 봐왔다. 멀게는 ‘커피프린스’에서 피자를 접어먹던 윤은혜부터 ‘진짜 사나이’에서 먹을 것을 흡입하는 혜리를 ‘폭풍 먹방’이라고 칭하며  몇 번이나 돌려보는 최근까지. 프로그램의 포맷은 다르지만 그를 관통하는 정서는 유구하다. 복스럽게 잘 먹는 것이 가장 보기 좋다는 가족적 관점이다.

15일 오후 네이버 V앱을 통해 생중계된 JTBC 예능 ‘잘 먹는 소녀들’도 그럴 줄만 알았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들이 복스럽게 먹는 모습을 심야에 보며 자연스럽게 군침을 돌게 한다는 콘셉트는 브라운관에 옮겨지자 가학이 됐다. 잘 나가는 걸그룹 멤버 8명을 스튜디오 중앙에 앉혀 놓고 먹는 것을 반복시킨다. 수십 명의 방청객들이 이들을 둘러싸고 먹는 모습을 구경하고, 나아가 SNS 등지에 생중계해 투표를 받는다. 가학을 넘어선 재앙이다.

‘잘 먹는 소녀들’의 가학을 논하기 전에 먼저 짚어야 할 것이 있다. 대중문화가 여성 연예인들을 소비하는 정서다. ‘잘 먹는 소녀들’에 출연한 걸그룹 멤버들이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다. 유명인은 날씬해야 한다는 사회적 강박 때문이다. 이들은 ‘1일 1식’을 하거나, 하루에 고구마 한 개만 먹거나, 아예 안 먹거나 한다. 일반적으로 노력에는 보상이 따른다는 인식도 이 강박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 연예인이 날씬한 것은 당연한 것이며, 자연의 섭리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그렇게 고생해서 날씬해진 소녀들을 데리고 성치경 CP는 밥을 먹였다. 4시간 동안. 

‘잘 먹는 소녀들’이 가학적인 지점은 바로 여기에 위치해 있다. ‘복스럽게 잘 먹는 것이 보기 좋은 것’이라는 가족적 관점과 ‘날씬해야 한다’는 강박 사이에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소녀들을 밀어넣은 다음 방치한다. 음험하기 그지없다. 소녀들은 예쁘고 날씬하기 때문에 자신들을 좋아하는 팬의 니즈도 충족시켜야 하고, 보기 좋게 먹어야 하는 미션도 수행해야 한다. 동시에 방청객에게도 즐거움을 줘야 하고, SNS 너머 텍스트로 자신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심지어 녹화가 아닌 생중계라 쉬는 시간도 없다. 싫은 티를 내면 아웃이다.

‘잘 먹는 소녀들’은 심야 먹방이 아니다. 걸그룹에게서 인권을 뺏은 다음 보기 좋게 스튜디오에 전시할 뿐이다. 이는 단지 브라운관 속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날씬하기도 해야 하고, 일도 잘 해야 하고, 가족적 정서도 충족시켜야 하고, 싫은 티를 내도 안 되는 것.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얘기다. JTBC는 혹시 한국 사회의 여성인권 실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하나는 분명하다. ‘잘 먹는 소녀들’의 인권의식은 망했다. 망(亡).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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