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과 열정을 미로 치환하는 대작가의 길

힘과 열정을 미로 치환하는 대작가의 길

기사승인 2016-06-23 15:04:24

전주 모악산 자락 나지막이 자리한 유휴열의 작업장은 진정한 창작의 공간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실증하고 있는 듯싶다. 높은 천장과 널따란 면적의 작업장은 마치 공장을 방불케 한다.

바닥과 벽을 채우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작품과 도구 및 공구 그리고 재료에서 발하는 열기로 인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공연히 신열에 빠져드는 기분이다. 마치 방문객 자신이 작가로 착각하게끔 만드는 현재진행형인 작업장의 열기는 뜨겁고도 실제적이다. 한마디로 작업에 관련한 모든 것이 노출됨으로써 의문의 여지가 없다. 거기에는 작가적인 신비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의 현장이나 다름없기에 그렇다.

공장의 노동과 같은 치열한 행위가 천상의 꽃과 같은 미로 치환되는 현장을 목도하고도 창작공간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 공간에서는 평면과 부조 그리고 입체가 함께 함으로써 조형적인 스펙트럼을 정연하게 보여준다. 평면에서 부조 그리고 입체로 이어지는 조형적인 변천과정은 드라마틱하다. 유채물감의 질감으로부터 발단하는 입체에의 욕구는 알루미늄과 한지라는 재료와 만나면서 본격화되었다.

무엇보다도 알루미늄이라는 공업적인 재료를 도입하면서 단숨에 부조작업으로 직행하였고, 거기에서 입체작업으로 진전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평면작업이 일루전에 의한 허상의 세계라면 입체작업은 현실적인 공간을 점유하기에 실제적이다. 허상이 아닌 실상을 구현하고 싶다는 욕망을 구체화하는 방법이 입체작업이다. 입체작업은 조형적인 공간의 확장을 현실에 일치시킨다. 평면작업의 일루전에서 해방됨으로써 조형적인 상상력의 진폭은 커지고, 창작욕구에 유인되는 표현행위는 신체적인 힘을 매개로하여 거대한 존재감을 각인시킨다.

그의 작업은 가족이라는 기반 위에서 발단하여 모악산을 통한 자연의 생명에 대한 성찰과 자의식의 심화를 통해 조형적인 외연을 넓혀왔다.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의식에 침전된 무엇, 기억의 편린, 사유의 흔적, 민족적인 자의식에 연루된 신명, 그리고 생명의 기운으로 상징되는 춤과 같은 행위가 모티브인 셈이다. 이들 작업의 모티브는 비구상적인 또는 추상적인 언어로 형용된다. 이해 가능한 시각적인 이미지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의식의 흐름이나 감정의 세계를 조형언어로 추출해내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다. 복잡하고 미묘하며 심오한 내면세계를 물감과 알루미늄, 한지 등의 물질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미지 자체보다는 물성에 부각시키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 모른다. 그의 작업은 알루미늄과 한지가 지어내는 물성, 즉 질료적인 특징을 선명히 드러낸다.

그의 작업은 어떤 장르, 무슨 재료이든 간에 감상자의 심미안을 자극하는 에너지로 넘친다. 손끝의 기술이 아니라 손과 팔 아니, 온몸의 힘을 결집시키는 작업으로서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리드미컬한 선과 둔탁한 터치는 내면에 응집된 창작의 열기가 불꽃처럼 분출하는 상황에 대한 솔직한 반응이다. 미의식 및 미적 감흥을 부추기는 창작에의 욕망은 언제나 과열되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로운 표현행위가 부단히 이어질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입체작업 가운데 기하학적인 패턴을 가진 일련의 작업은 지극히 이지적이고 논리적이다. 비록 구체적인 형상언어는 아닐지언정 선과 볼륨과 구성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이미지는 형식논리를 전제로 한다. 절제된 의식 및 행위를 통해 조형적인 긴장을 야기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히 눈으로 읽히는 조형적인 패턴과 논리가 담겨 있다. 자유로움에서 오는 시각적인 쾌감과는 다른 또 다른 형태의 미적이 쾌감을 수반하기에 그렇다.

이 모든 형태의 작업은 굵고 힘차며 대범한 선과 전통적이고 민족적인 정서를 함축하는 색채, 풍부한 표현감정 그리고 생동하는 기운을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조형적인 요소 및 특징은 모악산이라는 자연환경이 발설하는 기운과 무관하지 않다. 역동적인 신체의 힘과 미적 감흥 및 신명을 일으키는 것은 다름 아닌 대지의 기운이 아닐까. 산자락 끝과 들녘 한가운데에서 체감하는 기운은 전혀 다르다. 장엄한 산세가 배출하는 기운을 작업에 끌어들임으로써 노동의 가치를 미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노동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이미지 및 기운이야말로 대작가로서의 길을 보장하는 단서가 된다.

어쩌면 작업장과 창고를 빼곡이 채우는 엄청난 작업량에서 감지되는 거인의 풍모는 결코 허상이 아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대작가상은 작업량과 비례한다고 말하면 과장일까. 그는 어느 면에서 세계미술의 흐름에 둔감해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업은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형식을 통해 현대미술이 지향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구현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이제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눈 밝은 심미안의 소유자들에게 짜릿한 기쁨을 안겨줄 태세가 되어 있다.

조규봉 기자 ckb@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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