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고속도로 2차선을 달리던 빨간 관광버스가 휘청거리며 차선을 오간다.
놀란 앞차가 서둘러 차선을 바꾼 후 시속 105km의 관광버스는 그대로 돌진한다.
20대 여성 4명이 타고 있던 차량은 순식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졌다.
'위험한 질주'는 그렇게 끝이 났다.
지난 17일 41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영동고속도로 5중 추돌’ 사고는 관광버스 운전기사의 ‘졸음운전’이 원인인 것으로 드러났다.
졸음운전은 일반적으로 피로로 인해 발생하지만 예외가 있다.
바로 '기면증'이다.
현행 도로교통법은 기면증 환자들에 대한 사전 예방은커녕 사후관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기면증은 밤에 충분한 수면을 취해도 낮에 졸음을 참을 수 없는 병으로 성인 중 약 0.02~0.16%에서 발생하는 질환이다.
무기력함과 졸도발작, 수면 마비 등을 동반하기도 하며 일상생활 영위에 큰 불편을 겪는다.
이러한 기면증 환자들이 현재 우리나라 법령상 운전면허취득에 제약이 없어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서는 교통안전교육 이수, 신체검사, 학과시험(필기), 기능시험, 도로주행의 5가지 절차를 거쳐야 한다.
두 번째 과정인 신체검사에서 1‧2종 보통 면허 응시자는 시력과 청력검사를 받는다. 1종 대형 면허 같은 경우 색맹검사와 사지운동능력측정검사를 추가한다.
이 과정에 기면증과 관련된 검사 항목은 없다.
기면증 환자가 운전면허를 취득하는 데 필요한 것은 한 가지, ‘일상생활이나 운전면허 취득에 무리가 없다’는 의사의 소견서다. 소견서 제출 후 운전면허적성판정위원회에서 적격통보를 받으면 면허 응시 자격을 가질 수 있다.
문제는 소견서 제출이 환자의 ‘자진신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도로교통법 82조에 따르면 정신질환자, 간질환자, 마약, 대마, 향정신적 의약품 또는 알코올중독자와 같은 운전면허 부적격자는 질병에 관한 자진신고를 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기면증은 부적격에 해당하는 질병이 아니다.
한 자동차운전전문학원 관계자는 “병력사항에 기면증 기재란은 따로 없다”며 “우울증이나 치매가 아닌 이상 문제 될 것은 없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지방과 서울, 안산을 포함해 15년 동안 학원 강사 생활을 했지만, 기면증이 있다고 신고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말했다.
강남면허시험장 수시적성검사 담당자는 “기면증 환자가 병력 사실을 숨길 시 확인할 방법은 없다”고 밝혔다.
자진신고를 하지 않은 응시자에게 법적 제재를 가할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운전면허취득을 고려 중인 한 기면증 환자는 “회사 사정상 운전을 시작해야 하는데 소견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점이 상당한 부담”이라며 “강제성이 없다면 굳이 병을 알릴 필요가 있나 싶다”고 털어놨다.
졸음운전 교통사고 해마다 증가…‘기면증 환자’ 사후 관리 정책 전무
경찰청 교통사고 분석결과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졸음운전으로 인한 사망자는 해마다 100명이 넘는다. 2013년 4952명이었던 부상자는 지난해 5525명을 기록했다.
도로교통공단에서 발표한 ‘2014 교통사고 통계분석’을 보면 졸음운전 사고는 전체 교통사고 치사율보다 2배 이상 높은 것으로 조사됐으며, 특히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으로 인해 발생하는 교통사고 치사율은 전체 교통사고 치사율보다 7.5배 높게 나타났다.
또 삼성교통문화연구소는 18시간 잠을 안 자면 혈중알코올농도가 0.05%(면허정지 수치) 상태와 같고 24시간 동안 자지 않는다면 혈중알코올농도가 0.15%(면허취소 수치)인 만취 상태와 같아진다고 발표했다.
이같은 졸음운전의 위험성을 고려해볼 때, 의사 소견 없이 면허를 취득한 기면증 환자의 운전은 심각한 사고를 야기할 수 있다.
또 다른 문제는 기면증 환자들이 자신의 병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숨이비인후과수면클리닉 박동선 원장은 “기면증 환자들의 경우 보통 자신의 게으름이나 나태함 때문에 잠이 온다고 생각한다”며 “한 환자의 경우 졸음운전으로 폐차를 4번이나 하고 나서야 병원을 찾았다”고 말했다.
기면증이 의심되더라도 이를 확인하는 과정에는 많은 비용이 따른다.
기면증 확진에는 ‘수면다원검사’나 ‘다중수면잠복기검사’ 같은 전문화된 검사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검사 비용이 약 120만원 정도인데다 의료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환자의 경제적 부담이 적지 않다.
운전대를 잡은 기면증 환자들에 대한 사후 관리체계 역시 시급하다.
박 원장은 “미국의 경우 수면 전문의에게 1년에 한 번씩 진단을 받아야 면허를 지속할 수 있는 주(州)가 있다”며 “면허 취득 자체에 제재를 두기보다는 사후 관리에 힘을 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승희 기자 aga4458@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