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래 칼럼] 최근 영국 BBC는 ‘21세기 가장 위대한 영화 100선’을 발표했다.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2위에 랭크된 ‘화양연화’. 수업시간에 꼭 보라고 학생들에게 추천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순위안에는 없으나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도 소개하고 절정의 순간 마침내 사라지고 마는 사랑의 본질을 담은 영화라는 설명도 길게 덧붙였다.
학생들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심지어 몇 명은 코드가 맞지 않다는 눈빛까지 보내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해리포터 같은 판타지나 웹툰, 아이돌에 열광하는 아이들이 안타깝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세대의 가벼움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심지어 이 아이들이 앞으로 만들어 낼 문화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러던 차에 ‘2016 리우올림픽’에서 인상 깊은 한 장면을 보게 됐다. 바로 태권도의 강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이대훈 선수가 8강에서 떨어진 순간이었다. 모두들 억울함에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예상했을 터다. 그러나 TV에서는 그가 당당한 표정으로 상대인 요르단 선수의 손을 들어주며 박수를 보내고 있는 모습을 비춰주었다. "패자가 인정하면 승자도 더 편하게 다음 경기를 잘 치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게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가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다. 금메달 개수에 그토록 연연하던 올림픽이 뭔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스포츠맨십보다 결과에 집착했던 기성세대와 달리 이번에 출전한 젊은 세대들은 결과를 인정하고, 과정의 충실함에 만족하기 시작한 것 같다.
세대 차이는 결국 경험에서 나오는 관점의 차이다.
세계 최고의 프리미어리그와 메이저리그의 화려한 승부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올림픽의 승부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일본의 국수주의를 경계하면서도 금메달 하나 목에 걸었다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방송사 앵커들이 젊은 세대의 문화적 감수성을 못 따라 가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세대의 심각함과 무거움이 세상의 본질이라고 너무 고집 부려온 것은 아닐까?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융합 기술과 같은 새로운 세상에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새로운 세대를 애써 무시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문화를 먹고 자라난다. 우리 시절 비틀즈나 서태지처럼 말이다. 그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그들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다가서야 한다. 물은 언제나 아래로 흐르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너무 아쉬워는 말자. 유록화홍! 언제나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다. 세대를 떠나 변치않는 본질은 존재하리라. 그것을 온전히 물려주는 것은 우리의 몫일 것이다. 화양연화는 운명적인 사랑 영화로서 훌륭하다. 마찬가지로 빗자루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해리포터 또한 판타지 영화로서 훌륭한 것이다. 이해하지 못한다면 인정은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과 함께 세상의 균형추를 맞춰나가야 하는 것이다.
김시래 경기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