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장윤형 기자] 가령 누군가가 당신에게 1평 남짓한 공간에 갇혀서 죽을 때까지 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조건으로 평생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을만큼의 돈을 주겠다고 해보자. 아마 당신은 “억만장자가 된다고 해도 선택 하지 않을 것이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동물에게는 이 같은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인간의 복지환경도 개선되지 않는 판국에 무슨 ‘동물복지’를 운운하느냐. 스스럼없이 말을 내뱉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발언이다. 맞는 말이지만, 틀린 말이기도 하다. 매일 매일 우리 식탁 위에 올라오는 ‘달걀’을 대가없이 선물하는 산란계의 고충조차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찌 인간의 복지를 논할 수 있을까.
지난해 11월부터 시작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확산으로 살처분된 가금류가 3000만 마리를 넘어섰고, 미국산 달걀 100톤 분량인 약 160만 개가 국내에 들어왔다. 정부는 수요가 몰리는 설을 앞두고 미국 뿐 아니라 스페인 등 외국산 달걀 2500만 개를 수입할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AI 확산으로 인해 대규모 살처분 사태가 발생한 것은 국가적 재난이다. 이 같은 사태가 발생하게 된 데에는 정부의 허술한 방역, 농가주의 방역의식 미비로 인한 늦은 신고, 감염 농장의 색출이 늦어진 점 등 복합적 원인이 작용하고 있다.
취재를 하며 우리나라 축사에서 사육되는 산란계의 현실을 보게 됐다. AI 농가피해 확산에 있어 ‘공장식 축산’도 또 다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적게는 수만 마리에서 많게는 수십만 마리의 닭들이 함께 생활을 하고 있다. 산란계는 A4 용지도 안되는 공간, 이른바 ‘배터리 케이지’라는 곳에서 살며 알을 낳고 있다. 기자가 ‘AI 농가피해 확산 및 인체감염 우려’와 관련한 전문가 토론회에서 만난 농림축산식품부 고위 관계자는 “살처분 현장을 가보니, 농장주들이 작은 공간에서 수십만 마리의 닭들을 키우고 있었다. 계란-수급 조절 못지 않게 동물 환경 개선도 필요해보인다”고 말했다.
동물복지를 10여년 간 연구한 이혜원 수의학 박사는 닭이 살아가며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본성을 지켜주는 것이 곧 인간에게도 이롭다고 말한다. 닭의 지극히 정상행동이면서 안락행동인 ‘모래목욕’은 방목형 닭의 경우 이틀에 한번 실시한다. 그런데 케이지 사육방식에서는 갇혀 살기 때문에 모래목욕을 할 수 없고 좌절감에 빠진 닭은 자학행위를 하거나, 다른 닭을 공격하게 되고 털이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닭이 낳은 달걀이 우리 입 안으로 들어온다. 사육환경에 따라 닭 그리고 우리가 먹는 달걀의 품질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동물복지는 곧 인간의 복지라고 말할 수 있겠다. 1930년대 달걀의 대량생산을 위해 도입된 이 같은 밀집사육방식은 한국, 미국 등 많은 나라에서 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값싼 달걀’을 먹을 수 있게 됐다. 밀집된 사육방식은 결국 닭의 면역력 저하를 야기했고, 항생제 남용, 그리고 전염병의 급속한 전파라는 위험을 낳았다. 이를 인지한 뉴질랜드 호주 등 일부 국가에서는 단계적인 밀집사육 폐지를 추진하고 있다.
AI 사태의 직접적 원인이 공장식 사육에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국내에서 전례없는 미국산 등 외국산 달걀 대량 수입, 3000만 마리 살처분 등을 지켜보면서 지금과 같은 방식의 사육방식이 닭에게나 사람에게도 결코 유익한 방식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졌다. 정부는 매번 터지는 AI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달걀의 가격-수급 조절에만 힘쓰고 있다. 그렇지만 대규모 살처분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액은 5000억, 보상금은 2000억에 달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는 조류인플루엔자 사태가 발생하자 상·하차 작업팀(백신팀)을 투입하고, 소독시설이 동원, 살처분에 수의사, 공무원 등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는 등 ‘사후 처리’에 천문학적인 액수를 투입했다. 이 같은 사태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근본적 대책에 대해 고민할 때다. 이러한 점에서 산란계 거주 환경 개선 역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유럽연합(EU) 동물복지전략의 대표 표어는 ‘우리 모두가 책임이 있다’이다. 동물의 삶 개선이 곧 인간의 삶을 바꿀 것이다. 건강한 식탁을 위해서도, AI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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