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수살인’(감독 김태균)은 겉과 속이 다른 영화다. 살인사건 소재, 형사와 범죄자 대결 구도, 어두운 포스터, 배우 김윤석-주지훈의 출연 등 영화를 보지 않고도 어떤 영화인지 예상할 수 있다. 기존의 비슷비슷한 한국 범죄 영화 몇 개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암수살인’은 예상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기존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몇 가지를 만날 수 있는 건 반가운 수확이다.
‘암수살인’은 첫 장면부터 범인이 잡히면서 시작한다. 우연히 국밥집에서 정보원 강태오(주지훈)를 만나 연락처를 교환한 형사 김형민(김윤석)은 곧 그가 살인죄로 경찰에 붙잡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끝난 줄 알았던 사건은 감옥에 있는 강태오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오며 다시 시작된다. 한 명이 아닌 일곱 명을 죽였다는 얘기였다. 토막 살인을 디테일하게 늘어놓는 강태오의 이야기를 들으며 김형민이 그의 말이 진실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암수살인’은 경찰용어인 ‘암수범죄’(暗數犯罪)에서 가져온 제목이다. 범죄가 발생했더라도 수사기관에 인지되지 않거나, 인지됐지만 용의자 신원 파악 불가 등의 이유로 공식 범죄 통계에 집계되지 않은 범죄를 뜻하는 용어다. 한국 영화에서 처음 다루는 신선한 소재, 2010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다룬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는 것만으로도 이미 커다란 장점을 안고 가는 영화다.
독특한 소재 덕분에 ‘암수살인’은 수사와 체포 과정이 아닌 접견과 범죄 입증 과정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앞으로 일어날 살인을 막느라 뛰어다니는 대신, 과거에 일어난 살인을 증명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쏟는 것이다. 강태오가 받은 15년 형이 짧다고 생각한 김형민은 그의 형량을 늘리기 위해 교도소 접견실에서 고도의 심리전을 벌인다. 강태오는 이미 체포됐지만 미처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무기로 김형민을 쥐고 흔든다. 김형민은 매번 강태오에게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사건에 매달린다.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암수살인’이 담고 있는 메시지다. ‘암수살인’은 시종일관 인물들과의 거리를 유지한다.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이 되는 김형민과 함께 강태오의 성장 과정을 보여주며 관객들의 가치 판단을 뒤흔든다. 강태오를 괴물로 만든 건 누구인지, 그에게 부여된 형량이 적당한지, 경찰은 왜 암수범죄를 수사하지 못하는지, 왜 시민들은 실종신고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지에 관한 질문이 끝없이 관객들의 머릿속을 맴돌게 한다.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의 통쾌함과 함께 우리가 어떤 곳에서 살고 있는지, 그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시스템에는 문제가 없는지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암수살인’은 개봉 전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을 당했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 유족들이 자신들의 동의 없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 1일 유족들은 제작사 측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가처분 신청을 취하했다. 영화 제작 취지에 공감하며 응원하는 다른 유족들의 이야기가 알려지기도 했다. 욕설과 폭력 없는 형사의 무게감을 연기한 김윤석도 좋지만, 악역으로 연기 변신을 시도한 주지훈의 변화를 눈여겨 볼만하다. 3일 개봉. 15세 관람가.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