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층 더 어둡고 집요해졌다. 영화 ‘마약왕’에서 우민호 감독은 감정이입할 틈을 주지 않고 거리를 둔 채 한 인물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이야기를 선보였다.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는 가운데 인물들의 욕망이 분출하고 부딪힌다. 전작 ‘내부자들’에서 보여준 흥미로운 이야기, 캐릭터의 매력은 덜하지만, 기존 영화에서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지난 1970년대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하는 ‘마약왕’은 평범한 남성이 마약 밀수의 길로 들어서 성공하고 추락하는 과정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하급 밀수업자였던 이두삼(송강호)은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만 가득할 뿐 아무런 힘이 없는 인물이다. 폭력배들로부터 사촌 동생 이두환(김대명)을 구하기 위해 굴욕을 당하고, 경찰의 단속에 가장 먼저 붙잡혀 매질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다 마약 제조와 유통 사업에 눈을 뜨고 인맥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결국 이두삼은 대만에서 원료를 수입해 한국에서 제조, 일본에 파는 국제 마약 사업을 일으켜 큰돈을 벌게 된다. 서울에서 내려온 마약반 검사 김인구(조정석)는 마약이 유통되는 과정을 파악하던 중 이두삼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를 잡기 위해 함정을 판다.
‘마약왕’은 안전한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이두삼의 성공과 실패를 관객들과 함께 하며 감독의 메시지를 전하는 대신, 그가 살아온 8년의 궤적을 차분하고 끈질기게 따라간다. 인물의 성공과 실패, 그 의미에 대해서도 부연 설명을 하지 않는다. 이두삼의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이나 몰락하게 된 결정적 계시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마지막 순간까지 이두삼의 표정과 태도가 어떻게 조금씩 변화하는지 담긴다. 관객들마다 영화에 대한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영화에 대한 반응은 크게 엇갈릴 가능성이 높다. 지금 시점에 왜 이 영화를 봐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끝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전작을 의식한 것 같은 명대사 느낌의 대사들과 고문 장면이나 신체 훼손 장면들이 꼭 필요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다수의 독특한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계획된 틀 안에서 움직일 뿐, 영화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과거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내용인 점도 아쉽다. 1970년대 부산을 배경으로 한 중년 남성이 조직폭력배들과 손을 잡고 부와 권력을 잡게 되는 이야기는 윤종빈 감독의 영화 ‘범죄와의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 초반 코믹한 캐릭터로 등장했던 주인공이 좌절을 맛본 후 성장해 극적인 성공을 거두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몰락하게 되는 구성도 거의 같다. 특정 시기의 시대적 분위기를 한 인물의 이야기로 차분하게 풀어내는 점에선 한재림 감독의 ‘더 킹’과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데어 윌 비 블러드’도 떠오른다.
조금씩 비어있는 ‘마약왕’의 공간을 채우는 건 배우들의 연기다. 전체 분량의 80% 이상을 채우는 송강호의 존재감이 특히 압도적이다. 한국적인 이야기를 다룬 ‘마약왕’을 외국 영화처럼 만드는 건 오로지 송강호의 연기 덕분이다. 조정석과 배두나, 김소진, 김대명, 조우진 등도 기대한 것 이상을 해낸다. 시선을 뺏는 이중옥와 이서환의 연기도 주목할 만하다. 오는 19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