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의료인들은 폭언과 폭행이 난무하는 의료현장에서 무방비 상태로 환자를 보고 있습니다. 의료인 폭행문제가 반복되고 사회적 문제로 부상하며 병원들은 어떻게든 피해를 막아보려 발을 구릅니다. 하지만 정부는 남의 일인 양 병원들의 대응을 지켜보고만 있는 듯합니다.”
이는 응급실 내 의료인 폭행문제가 불거진 지 9개월이 지났지만 달라지지 않는 현실, 안전한 진료환경을 만들자며 정부와 정치권, 언론과 의료계가 한 마음으로 외치는 현 시점에서 임상현장의 의료인들이 느끼는 실상을 보여주는 말이다.
수도권 대형병원에 근무하는 전공의 A씨는 응급실 당직이 두렵다며 의학적 지식보다 담력과 호신술을 먼저 익혀야하는 것 아니겠냐는 농담 같은 말을 진담처럼 던졌다. 이어 전공을 바꾸거나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 것 아닌지 고민하고 있다는 속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부가 뒷짐만 지고 병원도 비용에 골몰하는 동안 언론보도로 접한 의료인 폭행 피해사건의 주인공처럼 언제 주먹이 자신에게 날아오고 피해자가 될지 모르는 삶이 계속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문제는 이 같은 고민이 A씨만의 것이 아니란 점이다.
2019년을 몇 시간 앞둔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에서 의사가 환자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사건현장에 있었던 의료인들은 충격을 치료한 후 대부분 병원으로 돌아왔지만 충격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강북삼성병원 관계자는 “일부는 아직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는 등 트라우마를 떨쳐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다행히 대부분이 현장으로 복귀했지만 그들에게 임세원 교수의 마지막 모습은 평생 잊히지 않을 장면으로 남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이 외에도 심한 폭언이나 폭행, 추행 등을 경험한 이들에게 환자나 보호자는 더 이상 이성적으로 웃으며 대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경계해야할 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임상경험이 많지 않은 저 년차의 경우 이 같은 경향이 강해지는 듯하다.
다행이라면 의료인 폭행사건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며 의료기관들이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주위 평판이나 병원 이미지 손상을 걱정해 쉬쉬했던 것과 달리 사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이다.
한 종합병원 임원 B씨는 “사건이 발생할 경우 부족한 인력에 더 큰 공백이 생기고, 원상회복까지 시일이 걸린다. 사회적 분위기도 주취자 등 심신미약에 대한 죄를 경감해주지 말자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어 대응에 보다 적극적일 수 있게 됐다”고 풀이했다.
하지만 적극적인 대응에도 한계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CCTV나 비상벨, 탈출로를 설치하고 경찰의 즉각적인 출동을 약속받아도 사건은 예고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다”면서 “결국 사람이 막아야한다. 그렇지만 보안인력이 필요한 곳은 많고 교대를 고려하면 1~2명으론 안 된다. 대형병원이 아닌 한 1팀을 운영하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토로했다.
이어 “정신건강의학과의 경우 보안요원의 배치기준이 있지만, 전국에서 이를 지키고 있는 곳은 아마 서울대병원이 유일할 것”이라며 “국민 개개인의 돌출행동이나 감정변화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부가 적극적이고 과감한 지원을 하지 않는다면 획기적인 개선은 어렵다. 하지만 지금 논의되는 내용을 들어보면 정부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하다”고 지적했다.
정부와 대한병원협회, 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2달여에 걸쳐 논의하고 있는 안전한 진료환경 구축을 위한 방안에서 대국민 인식개선을 위한 공익광고는 여타 사안에 비해 공익성이 부족하다며 후순위로 밀렸다. 시설 및 보안인력 확보를 위한 지원 명목의 논의 중인 안전관리수가도 보안인력 1명 정규직으로 뽑기에도 힘든 수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응급실 의료인 폭행사건이 연일 언론보도로 알려지고 사회적 문제로 거론되며 처벌이 강화됐지만 사건은 계속 발생했다. 이들이 공익광고니 캠페인을 얼마나 볼 것이며 우발적으로 저지르는 범죄를 어떻게 방지하겠느냐”면서 “실효성이 없어 보이는 생색내기용 대책”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솔직히 정부는 적당히 대책을 마련하는 시늉만 하며 여론이 잠잠해지길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얻을 것은 없고 해줘야하는 것들만 많기 때문”이라며 “안전한 진료환경은 누굴 위한 것이냐. 국민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의료계만 발버둥치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