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병원이 대표적인 인권사각지대로 꼽히는 의료기관의 실태를 파악하고, 본격적인 개선에 나섰다. 당장 근로조건과 취업규칙의 변화를 설명하고 차별과 직장 내 괴롭힘, 노동에 대한 적정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지역별 설명회도 열었다. 하지만 일선의 간호사들은 정부와 병원이 추진하는 변화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어떤 변화가 예정돼있고, 일선 현장의 간호사들은 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비관할까. 대한병원협회가 지난 19일 대구에 이어 24일 서울에서 개최한 ‘간호인력 근무환경 개선 권역별 설명회’에서는 보건복지부와 고용노동부, 노무법인, 인권센터, 의료기관 대표가 나와 앞으로의 개선방향과 개선 시 의무사항 및 유의사항 등에 대해 설명했다.
특히 보건복지부 간호정책TF 이석준 사무관은 ▲간호관리료 산정기준 개선 ▲시간제 간호사 처우개선 ▲인권침해 대응매뉴얼 제정 ▲간호사 인식개선 대국민 홍보 ▲간호조무사 실태조사 및 교대제 개편연구 ▲관련 법령 정비 ▲간호대 정원조정 등 간호사들이 환자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여기에 ▲전문간호사 활성화 연구는 오는 5월부터 ▲야간근무간호사 처우개선 ▲교육전담간호사 인건비 지원 ▲신규간호사 대기순번제 가이드라인 마련 등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간호사의 근무환경과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직·간접적 정부지원이 필요하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일부 반영한 결과다.
문제는 병원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이다. 노무법인 휴먼플러스 대표인 최우창 노무사는 병원들의 인사관리나 처우에 문제가 많다고 꼬집었다. 승진이 정체되고, 태움이나 임신순번제가 여전하며 5년 이하 연차 간호사들의 피땀으로 유지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설명이다. 더구나 법에서 정한 수당이나 휴일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이에 최 노무사는 “병원에서도 간호부의 인사관리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근무일정을 수간호사가 짜는데다 교대주기가 명확하지 않아 생체리듬이 깨져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고, 여성이 대부분인 간호사들의 임신과 출산에도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직률이 높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며 “개선을 위한 병원들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더 큰 문제는 병원과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간호사들이 일련의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거나 근본적인 대책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간호사는 직장 내 괴롭힘 방지 등 의무조항이 추가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나, 병원 내 인권신장 및 처우개선을 위한 논의에 대해 “간호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싸늘한 반응을 보인다”고 전했다.
그는 “병원 관리자나 대한간호협회는 인권을 신장하자며 행복한 간호사 뱃지, 태움 예방 뱃지 달기, 서로 존중하기, 인사하기 등 효과 없는 캠페인만 열거한다. 인력수급정책도 간호학과 학사편입학 비율 확대나 간호조무사 업무확대가 전부”라며 “간호사들의 인권을 위해 당장 필요한 것은 인력충원”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재 면허를 가진 간호사들의 절반만 일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잘 훈련된 경력간호사들의 이탈률을 줄여야 한다”면서 “본인의 일을 제대로 하고, 후배교육을 챙길 시간이 필요하다. 적어도 일할 때 물 마시고 밥 먹고 화장실 갈 수 있는 상황과 인력이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간호사 인권 및 처우문제, 특히 간호사들의 ‘태움’ 문화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계기인 故박선욱 간호사 사건과 관련해 근로복지공단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지난달 6일 “중환자실에서의 교육과정과 긴박한 업무수행이 고인에게 상당한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며 산업재해를 인정했다.
특히 판정위는 “간호사 교육의 구조적 문제로 직장 내 적절한 교육체계 개편이나 지원 등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자기학습 과정에서 일상적인 업무내용을 초과하는 과중한 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며 좁은 의미에서의 태움뿐 아니라 병원사업장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재해가 발생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서울아산병원은 여전히 유가족 등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병원장 면담요청 또한 응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고 사건 이후 병원 내부적으로 크게 달라진 점도 없는 듯하다.
병원은 신규 간호사 채용을 늘리고 ‘자긍심TF’를 꾸려 구조적 문제의 개선에 나섰지만 일선 간호사들은 “병원 스스로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조용히 내부적으로 수습만 하고 있다. 실질적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며 여전한 태움과 근무상 어려움을 호소했다.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