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1년’…해변과 숲과 오름의 길을 찾아 걷기 시작하다

‘제주도에서 1년’…해변과 숲과 오름의 길을 찾아 걷기 시작하다

기사승인 2019-08-10 00:00:00

7월은 제주도 생활하기를 시작하기에 적당한 때는 아니다. 맑은 날은 쏟아지는 강렬한 햇빛을 머리에 이고 걷기가 매우 힘들다. 해변에선 시원한 바닷바람이 있어 조금 수월할 듯 느껴지지만 빠르게 지친다. 숲에 들어가면 그늘 속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이 상쾌해 해변보다 더 편안할 듯하지만 강원도 어느 산골짜기의 숲과는 전혀 다르다. 제주도에선 해변에서든 숲에서든 불어오는 바람에 습도가 높아 바람의 상쾌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적어도 7월엔 그렇다.

뜨거운 햇빛과 7월 중순까지의 장마를 예상했으면서도 7월 4일 무모하게 제주도에 온 이유는 건강 때문이었다. 이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긴 여행을 시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몇 년 전부터 운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 퇴직 후의 생활에 서예를 한 축으로 끼워 넣으면서 용맹정진하는 마음으로 매달렸었다. 매일 두어 시간 이상은 글씨에 매달려 있었으니 운동은 꿈도 꾸지 못했다. 퇴직 전 종합검진 결과지를 받아들고는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아내 역시 그리 결과가 좋지는 않았는데 그 심각성을 늘 잊는 듯했다.

본래는 4월 초에 제주여행을 시작하려 했었다. 3월도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눈이 불편하다고 하며 인공눈물을 자주 쓰는데도 그 불편함이 가시지 않았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 거울을 보더니 와 보라며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세상에! 안면마비였다. 며칠 전 귀 뒤쪽이 갑자기 심하게 아프다며 주물러 달라 했는데 그것이 전조증상이었다.

신경과의원에서는 석 달 정도는 지나면 대부분 큰 후유증 없이 회복된다고 하며 스테로이드를 처방해 주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걱정하며 다양한 치료법을 권했다. 아내가 솔깃할 겨를도 없이 사람들의 만 가지 특효처방을 일축했다. 처방받은 약을 1주일 먹고 안면마비는 눈에 띠게 호전되었고 용량을 낮추어 1주일을 더 복용 후에 의사는 더 이상 진료가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5월과 6월에 예정되어 있던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제주도 여행 일정은 뒤로 미루었다. 주변에 복잡한 일들 어느 정도 정리되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니 서둘러 갈 필요는 없었다. 7월과 8월은 한 여름이라 적당하지 않은 때이니 천안에서 여름나고 9월 중순에 추석까지 지낸 후 여유 있게 가자고 했다. 그렇게 제주도에 갈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둘 생겨나고 있었다. 추석 지나고 나면 또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니 제주도 여행은 불가능해 보였다.

퍼뜩 나는 어떤 일이든 앞에 두고 해서는 안 되는 이유, 할 수 없는 이유를 먼저 생각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찌 보면 매우 소극적인 사고방식이고 비관적인 삶의 방식이다. 나로서는 늘 나와 가족을 위해 가장 안전한 길을 찾는 방법이었다. 늘 생각은 많고 결정은 느렸다. 생전에 어머닌 나의 이런 점을 못마땅해 하셨다. 무슨 일이든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궁리만 한다고 핀잔하시곤 했다.

뒤늦게 대학 생활을 시작하면서도 이런저런 궁리는 떠나지 않았다. 당장 하루하루 필요한 학비문제 해결이 무엇보다 어려운 문제였다. 과외가 금지되어 있고 다른 수입원은 없으니 퇴직금으로 받은 돈이 사라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엇인가 일을 하고는 싶은데 해도 될지, 할 수는 있을지를 고민하고 학비 보조금까지 준다는 대학으로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종국에는 대학을 계속 다닐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 할 정도까지 상황이 나빠졌다. 그렇게 결국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뒤의 취업시장은 화려했다. 일자리가 넘쳐 다들 괜찮아 보이는 직장을 일찌감치 확보하고 여유 있게 마지막 학기를 즐기고 있었다. 아무도 취업을 고민하고 있지는 않는 듯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누구나 알만한 회사들 대부분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신입사원 채용 공고를 내고 있었지만 나이 제한을 두고 있어서 나는 단 한 곳도 응시할 수 없었다.

중소기업 면접을 보러 다녔다. 이력서에 써 넣은 ‘철도고등학교 졸업과 성균관대학교 4년 장학생’이라는 두 줄만 보고, 간단한 질문 주고받은 후 대부분의 면접자들은 출근을 제의했다. 문과 졸업생에게 제의하는 일자리는 대부분 영업직이었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가장 자신 없는 부문이었다. 급여가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안정적인 일자리로 보이지도 않았다.

1976년 12월 하순 철도공무원 발령을 받고 정거장 근무를 시작했을 때 아버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다른 직원들을 바라보며 앞으로 40년 동안의 내 생활이 빤히 보였을 때의 당혹감이 은근히 다가왔다. 어쩌면 평생 조금 더 조건 좋은 직장을 찾아 철새처럼 떠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 여행 일정을 뒤로 미루고 평온하게 지내다 퍼뜩 삼십 년 전의 그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십 년 전에도 그랬다. 예순 살의 내 앞에 무료하고 시들한 인생이 펼쳐졌다. 천안의 넓고 편한 아파트에서 때로 앞산 산책하고 글씨 연습하고 때로 멀지 않은 곳에 나들이 다녀올 것이다. 때로 아이들이 찾아오면 반갑게 맞이하고 손자와 손녀가 귀여워 눈을 떼지 못할 것이며, 그 아이들 소식과 발걸음이 뜸해지면 때로 전화기만 만지작거리다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소일거리를 찾겠지.

6월 말에 예약되어 있던 검사 결과 아내나 나나 건강에 많은 적신호가 켜져 있었다. 집에 와서 그길로 번갯불에 콩 볶듯 제주도에 갈 준비를 했다. 완도항에서 출발하는 배표를 예매하고 짐을 쌌다. 옷가지와 신발 등 험하게 다루어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물건들은 택배로 발송했다. 나머지 일상생활에 필요한 부엌 살림살이와 컴퓨터 등은 최대한 많이 승용차에 실었다. 차 시동을 걸며 말했다. 가서 걷자. 옆자리에서 아내가 따라 말했다. 그래 걷자!

제주도엔 걸을만한 길이 많았지만 낯 선 곳을 무작정 찾아갈 수는 없으니 가까운 바닷가 길과 안전한 숲길을 찾아다녔다. 제주도의 바닷가 길은 그 어디든 가슴이 시원해진다. 함덕 바닷가의 오름인 서우봉은 매우 낮지만 올라가면 보여주는 사방의 경치는 한라산 정상에서의 경치 못지않았다. 곶자왈과 오름을 포함하고 있는 자연휴양림의 탐방길은 울창한 밀림 속을 걷는 모험의 길이지만 거리가 지나치게 멀지 않고 잘 정비되어 있어 걷기 좋은 길이다.

걷자 하고 제주도에 와서는 뜻한 만큼 많이 걷지는 못했다. 날씨 탓일 수 있지만 따지고 보면 체력 탓이다. 절물자연휴양림에서 의욕적으로 먼 길을 걸은 뒤 발가락 물집이 잡혔다. 물집이 아물기를 기다려 선흘곶 동백동산이었다.

동백동산의 숲길은 5킬로미터 남짓 걸어서 원점으로 돌아오도록 되어 있다. 과거엔 이 숲에서 땔감을 구하고 집짓고 수리할 목재를 구하고 내다 팔 숯을 구웠다. 제법 많은 물을 가진 연못과 크고 작은 습지가 많아 물이 귀했던 시절 마실 물과 생활에 필요한 물을 길어 날랐다.

이 숲에 지천이었던 동백나무는 귀한 나무였다. 나무의 재질이 좋아 각종 생활용품을 만들었고 열매로는 기름을 짰다. 목재로, 땔감과 숯으로 나무를 베어내면서도 손대지 않고 남겨둔 동백나무들이 사람들의 눈에 쉽게 보일만큼 많이 자리를 잡으면서 동백동산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것이다.

동백동산 숲길로 들어섰다. 공기의 느낌이 축축하면서도 끈끈하다. 마치 깊은 동굴의 입구에 선듯했다. 숲길은 매우 어두웠고 온통 바위가 울퉁불퉁할 뿐 흙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숲속을 가만히 살펴보니 바위틈을 비집고 각종 고사리류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나무마다, 바위마다 마치 옷을 입듯 이끼를 덮어쓰고 있었고 때론 콩짜개덩굴을 갑옷처럼 두른 나무도 보였다. 송악, 담쟁이덩굴 등이 나무에 올라타 함께 햇빛 경쟁을 하고 있다. 힘겨운 나무들이 행여 바람에 쓰러질세라 바위틈새를 비집으며 뿌리를 키워 바위를 움켜쥐고 다시 뿌리를 뻗어 다른 바위를 감싸고 있었다.

동백나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숲에 10만 그루의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다는데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전기가 들어오고 연탄이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나무를 베어낼 필요가 없어졌고 산림녹화 사업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면서 동백동산의 온갖 크고 작은 나무들이 무제한으로 마구 자라기 시작했다.

동백도 옆으로 퍼지기를 포기하고 위로 자라면서 햇빛 경쟁에 뛰어들었다. 나무마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잎을 달고 있으니 어느 나무가 어느 나무인지 나무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알아볼 방법이 없다.

어둠 속에서 겨우 길을 알아보며 숲 속의 이런 저런 식물들을 살피다가 나무숲동굴을 빠져나오고 보니 고요한 연못이 펼쳐져 있다. 주위로 높이 자라 오른 나무들이 바람을 막고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 쬐는데 물풀 사이로 노란 실잠자리 한 쌍이 알 낳을 자리를 찾고 있었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켜켜이 쌓이고 나무와 덩굴이 뒤엉킨 곶자왈 한쪽의 연못에서 식수와 생활용수로 퍼다 쓰며 사람들은 이곳을 먼물깍이라 불렀다. 물이 귀한 산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용암 암반 위에 자리한 먼물깍은 참으로 귀한 수자원이었다.

상수도가 보급되면서 물 사정이 좋아지니 사람들은 더 이상 이 먼 곳까지 물을 구하러 올 필요가 없게 되었다.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수생식물이 자라고 그 그늘 속에 각종 곤충이 터를 잡으면서 먼물깍의 주인이 바뀌었다. 먼물깍의 새 주인들을 위해 사람들은 이 일대를 람사르습지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동백동산 숲속에선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수많은 풀과 나무, 곤충과 동물이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 중이다. 아름드리나무조차 그 뿌리가 끌어안고 있는 바위가 부실해지면 쓰러지고, 도무지 살아남을 기약이 없던 어린 나무들이 그 곳에 비치는 햇빛을 놓고 치열한 키 크기 경쟁을 한다. 살아 있으면 기회를 바랄 수 있는 ‘곶’이다.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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